항목 ID | GC094009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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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改新敎 |
영어공식명칭 | Protestant |
이칭/별칭 | 프로테스탄트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탁지일 |
[정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
[김해 지역의 개신교 전래]
김해 지역의 개신교 전래는 서양 문화에 관심이 있던 김해의 지방민들과 부산에 거주하던 미국북장로교 선교사인 윌리암 베어드(Willam M. Baird)[한국명 배위량, 1862~1931]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베어드는 김해에서 자신을 방문한 두 사람[김종함과 배○○]과의 사랑방 만남을 가졌고, 성경 및 기독교 서적을 판매했다고 기록하였다. 이상규는 ‘배○○’을 김해교회 설립자 배성두(裵聖斗)[1840~1922]로, 배성두와 김해교회에서 함께 활동한 ‘칠원 김영감’을 김종함으로 보았다. 배성두와 김종함은 김해 지역에서 최초의 교회인 김해교회의 설립을 주도한 것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는 “김해읍내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본지인 배성두가 부산에서 복음을 득문하고 귀가 전도하야 신자 10여 명이 계흥함으로 교회가 수성하니라.”라고 1898년 김해교회의 설립을 전하고 있다.
1891년부터 호주장로교회의 선교가 공식화 되면서 김해 지역의 개신교는 본격적으로 성장하였다. 호주장로교 한국선교회 부산선교지부는 김해를 포함한 동래·기장·울산·언양·울릉도·양산·밀양·영산·창녕 등을 관할 지역으로 하였다. 특히 김해 지역 교회들은 선교지부들[부산·진주·마산·통영·거창]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어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드린 지역의 선각자들과 선교사들의 순회 목회 활동으로 지속적 발전을 하였다.
[개항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김해 지역의 개신교]
김해 지역에 설립된 개신교회는 김해교회를 포함해 8곳이 있었다. 대동면의 김해감천교회(통합) 연혁에 따르면, 1891년 베어드에서 김수익이 전도를 받았고, 후에 선교사들의 전도로 10여 명의 신자들이 생겨났다. 1893년 김수익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3년 만에 30여 명으로 성장했다.
진영교회[신용교회]는 1901년 심익순의 인도로 김해군 진영읍 신용리 383번지 최익준의 집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진영감리교회는 부산 지역 감리교의 모교회이다. 김해교회에 다니던 최윤기에 의해 1901년 장로교회가 설립되었으나 1959년 이후 감리교회로 교단이 변경되었다.
한림면의 시산교회(통합)는 1904년 4월에 가정교회로 시작했다. 1964년에는 시호교회(고신)와 분리되었다. 주촌면의 김해내삼교회(고신)는 1905년에 설립되었다.
장유의 관동교회는 1908년 1월 17일 강태필의 집에서 모이기 시작하였고, 1911년 8월 21일 장유면 율하리 초가 두 칸을 매입하여 교회를 설립했으며, 서성숙 조사가 시무했다. 1924년 4월 24일 장유면 관동리 화초부락에 관동기도소를 설립했으며, 임치수 조사가 시무했다. 1931년 2월 2일에 이르러 김영순이 장로 장립되어 당회가 조직되었다.
장유중앙교회(기장)는 1908년 4월 1일 장유면 신문리 상봉리부락에서 최일선을 중심으로 설립되었고, 1925년 2월 6일 최일선이 초대 장로로 장립되었다.
김해 지역의 개신교는 일제 강점기 3·1독립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김해 지역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30일 김해 읍내에서 시작되었는데, 김해 출신으로 서울 세브란스의전 학생 배동석과 마산 창신학교 교사 임학찬, 서울 정신여학교 학생 구명순 등이 주도하였다. 이날 시위로 배동석과 임학찬이 체포되었고, 배동석은 징역 1년, 임학찬은 징역 7월의 형을 선고받는다.
3·1운동 이후 김해 지역에서 개신교의 다양한 활동으로 일제의 탄압이 있었지만 개신교의 교세는 지속적으로 성장하였다. 1922년에는 임리교회가 설립되고, 김해교회가 건물을 신축했으며, 1923년에는 도도교회가 설립된다. 1926년 김해 지역에는 13곳의 교회에 2천여 명의 교인이 있었는데, 그 중에 김해교회는 교인이 500여 명에 이르렀다. 김해교회에서 1925년 내동과 봉곡에 각각 교회를 설립하자, 각각 80여 명과 30여 명의 새로운 교인들이 교회를 찾았다. 1938년이 되면 김해 지역의 개신교회는 장로교회만 25개에 이르렀다.
김해 지역 개신교인들은 사회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27년 설립된 민족 운동 단체인 신간회 김해지부와 1930년 김해 지역 항일 학생 운동에도 적극적인 활동이 있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후반 경상남도 지역의 개신교는 일제의 신사 참배와 전시 협력 강요로 인해 커다란 어려움을 겪게 된다. 경상남도 지역 장로교단의 전시 협력 활동은 경남노회의 신사 참배 결의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후에 결성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 경남노회지맹과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경남교구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김해 지역의 개신교도 이러한 친일 협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해방 후 김해 지역의 개신교 활동]
해방 후 발발한 6·25전쟁은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 지역 개신교 성장의 전환점이었다. 전쟁의 시작으로 전국의 개신교 피난민들이 김해 지역에도 유입되면서 급격한 양적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피난지 부산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김해 지역은 낙동강 방어선 서부에 근접해 있었지만 많은 피난민들이 찾아와 피난 생활을 했다.
2000년 이후 김해 신도시 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김해 지역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양적으로 빠르게 성장해오고 있다. 현재 김해 지역은 남해고속도로를 중심으로 김해 도심과 장유의 두 생활권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각 교회 연합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고, 김해시기독교연합회를 중심으로 종교 및 사회봉사 활동을 해오고 있다. 김해시기독교연합회에는 현재 240개 교회들[고신 49, 통합 43, 합동 43, 기타 105]과 12개의 기독교기관들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활동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