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3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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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二五戰爭 |
영어공식명칭 | The Korean War |
이칭/별칭 | 한국전쟁,육이오동란,육이오사변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창섭 |
[정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체결 때까지 경상남도 김해 지역을 비롯한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전쟁.
[개설]
흔히 ‘한국전쟁’이라고도 일컬어지는 6·25전쟁은 내전과 국제전의 성격을 복합적으로 지닌 것으로 평가되는데, 이는 전쟁의 기원과 배경 그리고 전개 과정에서 자본주의 세력권과 공산주의 세력권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었음에도 일제 식민지 유산이 단절되지 않아 민족 갈등과 계급 갈등이 폭력적 방식으로 해소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증폭되어 갔다. 여기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데올리기 대립과 갈등까지 덧붙여지면서 한국 역사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이 되었다.
[역사적 배경]
먼저 6·25전쟁의 내적 기원을 살펴보면, 그것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 따른 한인 간의 계급 및 신분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남북 분단은 말할 것도 없고 동족상잔의 비극은 35년 동안 일제가 심어 놓은 식민지 통치 체제의 모순으로 폭발한 것이었다. 6·25전쟁의 배경을 일제 강점기까지 소급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외적 배경으로는 세계대전 이후 국제 정세와 미·소 양국의 대한 정책 변화에 있다. 1949년 중국의 공산 혁명과 소련의 핵 개발이 성공하자 미국은 동아시아 정책에서 봉쇄[containment] 전략을 일층 강화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한국에 대한 자신들의 역할을 축소하였다. 애치슨라인이 대표적이다. 그로 인해 김일성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하고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소련의 스탈린이 북한의 남침을 전격적으로 동의하면서 남과 북의 동족상잔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경과]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고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인 8월 3일, 연합군은 김해 인근의 낙동강까지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김해에서는 7월 4일 시국비상사태대책위원회 회의가 개최되고 순회 강연회가 열렸다. 위문 금품 모집과 하곡 매입 등이 결정되기도 하였다. 비상사태대책위원회와 군경은 학도의용대와 함께 군사 활동을 시작하였다. 9월 23일부터는 김해에 경남지구 계엄사령부의 지휘하에 부산지구 헌병대의 분견대가 설치되었다. 김해 지역에서는 전쟁 기간 동안 남로당 출신의 야산대들이 활동하였다. 1953년 3월에는 진영읍 의전리 출신으로 여겨지는 남로당 유격대 3명이 체포되었다. 김해 관공서는 야산대나 유격대의 활동을 저지하고자 전쟁 초기부터 17세 이상 40세 이하 김해 지역 청장년들을 자원입대 및 강제 징집 형식으로 군 또는 제2국민병으로 복무시키기도 하였다.
김해는 전쟁 당시 여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이어서 피난민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1951년 1월 기준 김해 지역에 약 5,000명의 피난민이 유입되었는데,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대폭 증가하였다. 자료에 따르면 김해 관내 거주 인구가 대략 18만 명이었는데, 약 6%가 피난민이었다. 피난민이 급증함에 따라 김해 지역에서는 자생 단체들에 의해 구호 활동이 적극적으로 펼쳐졌다. 미군 또한 조직적으로 구호 활동에 참여하였는데, 김해는 경남도팀 소속 미군들의 지휘 감독하에 구호 활동이 전개되었다.
[결과]
분단을 해체하기 위해 시작된 무력 통일 전쟁은 도리어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남북의 집권층들은 전쟁의 위협을 강조하며 독재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항상적인 군사 동원 체제가 구축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현 체제에 대한 비판과 대안적 사유는 엄격하게 금지되었고, 한반도 구성원들은 자유민주주의냐 인민민주주의 혹은 사회주의냐 하는 양자택일만이 강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의 고착화는 전국적인 현상이어서 김해 역시도 예외일 수 없었다. 1950년대에 민주주의가 형해화되고 반공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 절차적 민주화의 요구와 평화 통일에 대한 전망은 잠복되었다. 1960년 3·15부정선거를 기점으로 김해 지역에서 민주화의 바람이 불어오기까지 근 1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하였다.
[의의와 평가]
첫째, 6·25전쟁이 남긴 정치적 유산으로 고착화된 남북 분단은 이승만 정권과 김일성 정권이 독재 체제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 전쟁이 남긴 군사적 영향으로 남북 모두 군사 중시 노선을 채택하였다. 군의 강화는 필연적으로 군의 정치 개입과 군부 집권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었고, 향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였다. 셋째, 6·25전쟁의 경제적 영향은 남한의 원조 경제 체제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체제 확립과 북한의 전후 복구 성공으로 인한 사회주의 경제 체제로의 진입이었다. 남북한의 이질성이 더욱 확고해져 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