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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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海- 邑誌 編纂- 『盆城輿地勝覽新增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신은제 |
[정의]
2018년 발견된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관한 가장 오래된 읍지.
[개설]
조선 후기 김해 지역의 읍지는 1759년 작성된 전국 지리서인 『여지도서』에 포함된 『김해도호부지』, 1786년 경 간행된 『김해부읍지』, 1832년 간행된 『경상도읍지』에 포함된 『김해부읍지』, 그리고 1899년 간행된 『김해읍지』 등이다.
『분성여지승람신증초』는 2018년 『김해시사』 편찬을 위한 자료 조사에서 처음 확인되었다. 조선 숙종대 추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증보 과정에서 작성된 것으로, 김해에서 가장 오래된 읍지로 이해되고 있다. 필사본 1책의 『분성여지승람신증초』는 책제(冊題)가 ‘김해여지승람(金海輿地勝覽)’이고, 권두제(卷頭題)가 ‘분성여지승람신증초(盆城輿地勝覽新增抄)’로 되어 있다. 이를 통해 원래 『분성지』 또는 『분성여지승람』으로 편찬되었다가 수정 증보(增補)되면서 이름에 ‘신증’을 추가한 것으로 판단된다, 김해의 별호였던 ‘분성’이 사용된 점이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지리서 편찬의 전통]
지리서는 특정 지역의 지리 정보를 수집 정리한 책이다. 동아시아 한국, 중국,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지리서를 편찬하였는데 지리서는 편찬 주체에 따라 중앙 정부에서 편찬한 지리서와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편찬한 지리서로 구분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기전체 사서인 『삼국사기』 지리지를 제외하면 모든 지리서가 조선 시대에 찬술되었다. 조선 시대 찬술된 지리서인 『경상도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은 모두 중앙 정부에서 편찬한 관찬(官撰) 지리서이다.
한편 지방 통치의 기초 자료 확보 및 향촌에 대한 유교적 교화를 위해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지리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통상 중앙 정부에서 만든 전국 지도를 ‘여지(輿地)’라고 하고, 지방 단위에서 찬술된 지리서를 ‘읍지(邑誌)’로 구분한다.
경상남도 지역에는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러 읍지들이 전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읍지는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읍지로 1587년에 찬술된 함안 읍지인 『함주지(咸州誌)』, 1625년에 찬술된 진주 읍지인 『진양지(晉陽誌)』, 1652년 밀양부사 신익전(申翊全)이 찬술한 『밀양지(密陽志)』, 그리고 1656년 정수민(鄭秀民)이 편찬한 함양 읍지인 『천령지(天嶺誌)』 등이 있다. 이들 읍지는 주로 지방관이나 향촌의 양반들에 의해 찬술되었다.
조선 후기 각 지방의 읍지에는 해당 고을의 정보가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가장 먼저 그 고을의 행정 편제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 가를 수록하였고, 이어 각 고을에 살아온 사람들의 성씨, 고을의 산과 강, 바다와 섬, 각종 수리 시설, 향교와 정자, 성곽과 봉수 등이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다. 또 세금 수취의 기준이 되는 해당 고을의 호구와 전답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또한 부임했던 지방관의 명단 혹은 업적을 남긴 지방관의 명단을 자세하게 수록해 놓았고 해당 고을의 저명한 인물 혹은 열녀, 충신 등도 빠뜨리지 않았다. 또 그 고을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한 이들의 이름도 수록해 놓고 있다. 이렇듯 조선 후기 읍지는 해당 고을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정보들을 수록하고 있다.
[김해의 지리서]
김해 지역의 지리서도 편찬 주체에 따라 여지류와 읍지류로 구분할 수 있다. 여지류 가운데 최초의 지리서는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지리지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내용은 매우 소략해 김해의 연혁만 간략하게 수록되어 있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태종대 전국 군현에 대한 조정이 완료되었고, 세종은 전국적 지리지 찬술을 계획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찬술된 책이 『경상도지리지』이다. 1425년(세종 7) 경상도관찰사 하연(河演), 대구군사(大丘郡事) 금유(琴柔), 인동현감 김빈(金鑌) 등에 의해 찬술되었고, 경상도 내의 각 부·군·현에 대한 정보를 연혁, 계역(界域), 산천, 관방(關防), 공물(貢物), 성곽, 진영(鎭營), 병강(兵舡), 교통, 고적, 토의경종(土宜耕種), 토지비척, 호구, 성씨, 인물, 봉화, 기후, 풍혈(風穴), 염분, 목장, 전설 등의 항목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경상도지리지』의 체계는 『세종실록』 지리지의 찬술로 완결되었다. 이즈음 기전체 사서인 『고려사』가 완성되었고, 그 결과 『고려사』 지리지도 찬술되었다. 그러나 『고려사』 지리지는 간단한 연혁만을 수록하여 조선 시대 지리서들에 견줄 바가 되지 못한다.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부족했던 인문 지리적 내용은 1481년 『동국여지승람』에서 대폭 보완되었다. 『동문선』의 간행을 통해 마련된 자료를 토대로, 『동국여지승람』에서는 각종 시문과 기문과 고적이 대폭 추가되었다. 총 50권으로 편찬되었고, 증보의 과정을 거쳐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출간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편찬된 여지류 지리서는 영조대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가 있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각 고을 단위로 읍지가 활발하게 제작되었는데, 김해 역시 마찬가지였다. 1786년 경 간행된 『김해부읍지』, 1832년 간행된 『경상도읍지』에 포함된 『김해부읍지』, 1895년 찬술된 『영남읍지』에 속한 『김해읍지』, 그리고 1899년 간행된 『김해읍지』 등이 조선 후기 김해 지역의 읍지로 알려져 있다. 1786년 경 간행된 『김해부읍지』는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奎17442]에 소장되어 있다.
『김해부읍지』는 ‘김해진김해도호부(金海鎭金海都護府)’라는 제목이 있고, 그 아래 방리(防里)‚ 도로(道路)‚ 건치연혁(建置沿革)‚ 군명(郡名)‚ 형승(形勝)‚ 산천(山川)‚ 성지(城池)‚ 관직(官職)‚ 성씨(姓氏)‚ 풍속(風俗)‚ 능침(陵寢)‚ 단묘(壇廟)‚ 공해(公廨)‚ 제언(堤堰)‚ 창고(倉庫)‚ 물산(物産)‚ 교량(橋梁)‚ 역원(驛院)‚ 목장(牧場)‚ 관액(關阨)‚ 누정제영(樓亭題詠)‚ 사찰(寺刹)‚ 고적(古蹟)‚ 진보(鎭堡)‚ 인물(人物)‚ 효자(孝子)‚ 열녀(烈女)‚ 진공(進貢)‚ 한전(旱田)‚ 수전(水田)‚ 조적(糶糴)‚ 전세(田稅)‚ 대통(大同)‚ 균세(均稅)‚ 봉름(俸廩)‚ 군병(軍兵)‚ 책판(冊板)‚ 선생안(先生案) 등 37개 항목으로 본문이 구성되어 있다. 호구수(戶口數)는 1786년[丙午式]을‚ 전결수(田結數)는 1785년[을사년]의 기결(起結)에 의거하였다. 그동안 1786년 경 찬술된 『김해부읍지』가 김해에서 가장 오래된 읍지로 알려져 왔으나, 2018년 『분성여지승람신증초』가 발견되면서 가장 오래된 읍지가 되었다.
[숙종대 『신증동국여지승람』 증보와 『분성여지승람신증초』의 작성]
1530년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光海君)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목판으로 제작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다. 숙종 대가 되면 지방의 변동이 상당히 발생하였고, 지리서의 간행 필요성이 제기된 결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수정 증보가 추진되었다.
첫 번째 증보 시도는 1679년(숙종 5) 병조판서 김석주(金錫胄)가 주도하였고, 두 번째 증보는 20년 뒤인 1699년(숙종 25) 좌의정 최석정(崔錫鼎)의 건의에 따라 추진되었으며, 세 번째 증보는 1706년 최석정이 영의정으로 복귀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3차에 걸친 증보 사업 추진은 숙종대 환국 등으로 인해 일관되게 추진되지 못했고, 결국 영조 대에 이르러 『여지도서』의 편찬으로 마무리 되었다.
김해에서 발견된 『분성여지승람신증초』는 숙종대 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증보 과정에서 찬술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분성여지승람신증초』에는 발문이 있는데, 발문을 살펴보면, 편찬에 참여한 인물은 김해 출신의 송수(宋洙), 노문필(盧文弼), 조구령(曺九齡) 등이다. 수정과 증보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편찬 시기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내용을 잘 살펴보면 4차례 정도의 편찬과 증보가 확인된다.
첫째 시기는 최초 형태인 『분성여지승람』이 만들어진 시기이고, 두 번째 시기는 김해부사를 지낸 안몽윤(安夢尹)[1571~1650]이 1630년에 「임관선생안(任官先生案)」 서문을 쓴 시기이다. 세 번째 시기는 1679년(숙종 5) 이후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증보 작업이 진행된 시기로, 김해의 사인(士人) 송수(宋洙), 노문필(盧文弼)[1650~1714], 조구령(曺九齡)[1657~1719] 등이 증보를 주도한 것으로 판단된다. 네 번째 시기는 김해부사 한형(韓珩)이 현재의 『분성여지승람신증초』를 완성한 1733~1736년 사이의 시기이다. 『분성여지승람신증초』의 최종 완성 시기는 임관(任官)조에 수록된 마지막 김해부사의 존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 김해부사는 1732년(영조 8) 6월부터 1733년 9월까지 재임한 이형원(李馨遠)이고 그 다음 김해부사는 한형(韓珩)이다. 따라서 이 책은 완성은 한형이 재임한 1733년 9월부터 1736년 7월까지 3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분성여지승람초』의 체제와 분류]
『분성여지승람신증초』의 내용을 살펴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도호부의 내용을 기초로 수정, 증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항목의 구성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항목을 약간 조정하였다. 『분성여지승람신증초』의 항목은 총 39개로 사방경계(四方境界)‚ 건치연혁(建置沿革)‚ 속현(屬縣), 진관(鎭管), 관원(官員), 군명(郡名)‚ 형승(形勝)‚ 풍속(風俗)‚ 각촌(各村), 관곡(官穀) 대동(大同), 숙창곡(稤倉穀), 사창곡(社倉穀), 산천(山川)‚ 토산(土産), 관우(館宇), 성곽(城廓)‚ 관방(關防), 단묘(壇廟), 학교(學校), 역원(驛院)‚ 군기(軍器), 봉수(烽燧), 제언(堤堰), 불우(佛宇), 고적(古蹟), 임관명환(任官名宦), 성씨(姓氏), 인물(人物), 유배(流配), 효행(孝行), 효녀(孝女), 규행 열녀(閨行 烈女), 과거(科擧) 문과(文科), 무과(武科), 사마(司馬), 음사(蔭仕), 능묘(陵墓)‚ 정표(旌表), 제영(題詠)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새로 추가된 항목은 각촌(各村), 관곡(官穀) 대동(大同), 숙창곡(稤倉穀), 사창곡(社倉穀), 군기(軍器), 제언(堤堰), 유배(流配), 효녀(孝女), 과거(科擧) 문과(文科), 무과(武科), 사마(司馬), 음사(蔭仕), 정표(旌表) 등이다. 명칭이 변경되거나 통합된 항목도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사묘(祠廟)는 단묘(壇廟)로 개칭했고, 궁실과 누정은 합해서 관우(館宇)로 통합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항목이 삭제된 사례도 있다. ‘교량’, ‘우거’는 『분성여지승람신증초』에서 제외되었다.
이처럼 『분성여지승람신증초』는 이전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도호부에 비해 항목과 내용이 대폭 증가하였고, 내용도 풍부해졌다. 예를 들어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도호부조에 수록된 관청과 누정은 객관(客館), 영추당(迎秋堂), 회로당(會老堂), 연자루(燕子樓), 청심루(淸心樓), 매균각(梅筠閣), 임금당(臨錦堂), 함허정(涵虛亭) 등 8곳임에 반해, 『분성여지승람신증초』에는 여기에 청뢰각(晴雷閣), 아사(衙舍), 연당(蓮堂), 대동청(大同廳), 관청(官廳), 숙창(稤倉), 부사(府司), 군기방(軍器房), 의국(醫局), 서역소(書役所), 해창(海倉), 대변청(待變廳), 금파당(錦波堂), 설창(雪倉), 형옥(刑獄), 동문서문(東門西門), 남문루(南門樓), 북문루(北門樓), 위원대(威遠臺), 장대(將臺), 산산대(蒜山臺), 범방대(泛舫臺), 무진정(無盡亭) 등 23곳을 더하여 수록하고 있다.
『분성여지승람신증초』의 내용에서 주목되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김해 지역의 인구와 토지가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기초로 하면서도 『경상도지리지』 혹은 『세종실록』 지리지처럼 인구와 토집 면적을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분성여지승람신증초』는 김해 지역의 인구와 토지 면적의 추이를 확인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분성여지승람신증초』는 각촌(各村)조를 설정해 각 촌 호(戶)수와 전답 면적을 상세하게 수록하였다.
촌[면]명 위치 호수 전답
상동(上東) 동 40리 463호 260결 26부 8속
하동(下東) 동 45리 1,195호 788결 87부 9속
활천(活川) 동 50리 447호 486결 48부 6속
좌부(左部) 남 10리 744호 458결 95부 1속
우부(右部) 서 15리 961호 204결 21부 8속
칠산(七山) 서 15리 333호 391결 30부 9속
주촌(酒村) 서 25리 569호 389결 96부
유등야(柳等也) 남 45리 878호 741결 49부 6속
대야(台也) 남 60리 956호 397결 61부 7속
율역(栗亦) 서 35리 573호 454결 57부
잇촌(㗡村) 서 45리 235호 262결 5부 2속
진례(進禮) 서 45리 ? 458결 41부 2속
하계(下界) 서 55리 261호 433결 95부 ?속
대산(大山) 서 65리 850호 ?결 ?부 ?속
중북(中北) 북 45리 630호 663결 75부 4속
하북(下北) 북 30리 ? 553결 63부 6속
생림(生林) 북 45리 700호 549결 7부 8속
계 10,601호 8,371결 27부 4속
『분성여지승람신증초』에서 촌은 이후 읍지에서는 면(面)에 해당한다. 『분성여지승람신증초』에 수록된 17개 촌은 1759년 『여지도서』가 찬술될 때에는 명지도면(鳴㫖島面)이 추가되어 18개 면이 되었고, 1786년 『김해부읍지』가 찬술될 때에는 녹산면(菉山面)이 추가되어 19개 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