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동아시아 교역의 중심, 가락국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006
한자 古代 東- 交易- 中心, 駕洛國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양훈

[정의]

고대 경상남도 김해 지역의 가락국이 주변 제국과 이루었던 인적, 물적 교류상.

[개설]

한반도 남동단에 위치한 김해 지역에서 일어난 가락국은 중국 대륙, 일본열도 그리고 한반도 제 세력과의 교류가 빈번하고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김해는 높은 산지가 겹겹이 둘러싸여 많은 인구를 수용할 만큼 가용 가능한 충적지가 풍부하지 않음에도 역사적으로 가야 제국의 중심국으로 지칭할 수 있었던 것은 김해 지역의 지정학적 입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김해 지역은 낙동강과 남해 연안에 위치하여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왜인전(倭人傳)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군현-왜의 교역 중계지로 알려졌고, 김해 대성동, 양동리 등지에 다양한 계통의 외래 유물들이 분포하였다. 이같은 기록과 고고자료가 남겨진 것은 가락국이 교섭 거점지이자 철산지로 동북아시아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인 것이다.

[고고자료로 본 가락국의 대외 교섭 동향]

김해 지역에 가락국이 들어서기 전 영남 지역의 교역 거점은 사천 늑도와 창원 다호리가 대표적이다. 남해 바다 가운데에 위치한 사천 늑도는 낙랑의 화분형 토기, 일본열도 야요이 토기 등이 다수 출토되어 바다를 통한 중국-일본열도간 교역 거점 중 하나로 부각되었으며, 철기 생산을 증명해 주는 단야로와 판상철부 등이 출토되어 철교역 거점으로도 알려졌다. 창원 다호리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 무렵까지 150여기의 목관묘가 확인되었고, 칠초동검, 소동탁, 성운문경, 오수전, 각종 칠기 등 다양한 중국제 유물이 출토되어 오랜 기간동안 낙동강을 통한 한군현과 한(韓)의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반면, 가락국이 들어서기 전 김해는 왜계 토기인 야요이 토기가 일찍부터 출토되었지만, 주변 지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물질적인 증거는 그다지 풍부하지 않다. 그러나 기원후 1세기 전반에 조성된 가야의 숲 3호 목관묘에서 칠기 부채, 원통형 칠기, 소문경 등이 출토된 후, 2세기 후반부터 김해 대성동양동리에서 조영된 대형 목곽묘에서 상당량의 철기와 함께 청동솥, 청동 거울 등이 출토되었는데, 함안, 고성 등 주변 지역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것은 김해 지역이 남해안 뿐만 아니라 낙동강을 통한 가야와 한군현의 교섭 거점으로 변모되었음을 말해준다.

이같은 경향은 3세기 후반에 이르러 더욱 뚜렷해지는데,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상당량의 토기, 철기와 함께 금동관, 청동솥 등 유물과 순장 등 가야 권역에 보이지 않았던 이질적인 북방 문화가 유입되었다. 문헌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자료는 보이지 않지만, 대성동 29호분에 담긴 북방 문화를 『진서』에서 보이는 마한, 진한왕이 주도한 서진과의 교섭과 연계하면, 가락국왕 주도의 교섭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313, 314년 낙랑군, 대방군의 축출 이후 가락국에서는 이전과 다른 양상의 대외 교역이 이루어졌다. 기존 학계에서는 한군현 축출 이후 가락국의 대외 교역이 일본열도 교섭 중심으로만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는데, 대성동 91호, 88호에서 북방계, 왜계 유물이 함께 출토되어 김해 지역이 여전히 대중교섭 뿐만 아니라 일본열도와의 교섭을 주도하는 거점 지역으로 발전하였음을 확인되었다. 특히, 서역계, 중원계 유물과 함께 일본열도 긴키계 유물이 출토되어 3세기 당시 중국 북방, 일본 북큐슈 지역과의 교류에서 보다 확대되어 가락국이 동북아시아의 교역 거점으로 발돋움하였음을 방증하고 있다.

그러나 4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김해 지역에서 대부분 왜계 유물 중심으로 출토되었던 유물들이 5세기에는 거의 보이지 않아 이전 시기의 화려하고 강렬했던 가락국의 모습이 사라진다. 이것은 4세기 후반 신라가 고구려를 등에 업고 가락국을 압박하였고, 창원 탁순국, 함안 안라국 등 가락국 주변 인접국의 성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400년에 일어난 광개토왕의 신라 구원전과 5세기 전반 가락국의 정국 혼란으로 교섭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는데 이르렀던 것이다.

[가락국의 교섭 거점지]

교섭 거점지로서의 가락국은 지형적으로 바다와 밀접하였다. 현재 김해시에는 바다가 없지만, 과거 김해 지역은 바다를 통해 주변과 연결되었다. 가락국이 일찍부터 대외 교섭의 거점지로 알려진 것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에 대방군에서 왜로 가는 바닷길에서 ‘구야한국(狗邪韓國)’을 언급한데서 시작된다. 이러한 사실은 3세기대 기록일지라도, 서기 9년에 신(新)을 세운 왕망이 주조하여 10여년 정도 통용된 왕망전(王莽錢) 즉 화천(貨泉)이 김해 회현리 패총[김해 봉황동 유적]에서 출토된 점에서 이미 기원 전후부터 가락국이 군현-일본열도를 연결하는 중개 무역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당대의 사실로 인정하는데 주저되지만,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허황옥 집단의 도래 때 가져온 한사잡물(漢肆雜物)과 중국으로의 조공길인 ‘조중수로(朝中水路)’가 기록된 점도 위의 사실을 방증할 수 있는 근거이다.

가락국 해상 교역의 고고학적 증거는 외래 유물 뿐만 아나라 김해 각지에 출토된 항구 유적이 주목할 수 있다. 봉황대 서쪽과 해반천 사이에 있는 김해 봉황동 유적에서는 호안 시설, 창고형 건물지, 정박지와 인접 지역인 옛 봉황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고석박 부재가 확인되어 왕궁이 들어선 봉황동 일대에 있었던 항구의 실증자료가 확인되었다. 특히 고선박 부재는 먼 바다를 오가는데 이용된 준구조선 측판으로 추정되어 가락국의 해양력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장유 관동리 유적에서는 항구시 설인 잔교와 도로 유구 그리고 각종 건물지가 발견되어 가락국 중심부가 아닌 외곽부에서도 항구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특히, 잔교 시설과 도로 유구가 연결되었고, 107동의 건물지, 10기의 우물이 주변에 입지하여 넓게 형성된 나루 읍락은 바다를 둘러싼 가락국의 중심과 주변 관계를 살펴보는데 좋은 자료라 할 수 있다.

[가락국의 철교역]

가락국의 대외 교섭에서 철교역은 빼놓을 수 없다. 가락국의 후대 지명이 신라 후기 금관(金官), 고려 시대 금주(金州), 조선 시대 김해(金海)로 명명하였듯이 쇠 금(金)을 유지한 것은 그만큼 김해 지역이 철과 밀접하였음을 말해준다. 가락국의 제철 산업은 문헌과 고고자료를 통해 일찍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고자료상의 가야권역 철생산은 기원전 1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창원 다호리 고분군에서 철검과 영남 특유의 농공구인 따비, 판상 철부, 늑도 유적에서 다수의 단야로, 판상철부가 출토된 사실로 미루어, 기원전 1세기경에 철기를 생산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가락국은 가야의 숲 3호의 따비와 노출전시관부지 60호에서 철모, 철촉, 철검 등 다양한 철기가 출토된 점을 보아 기원전후~1세기 전반에 초보적인 철기 생산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상 가락국의 철생산은 『삼국지』 “염사치 사화”(위략) 에 지황 연간[기원 후 20~22]에 숯을 만들기 위해 노예를 동원하여 벌채한 기사, 『삼국유사』에 탈해가 호공의 집을 빼앗기 위해 스스로 야장을 칭하고 숫돌과 숯을 묻은 기사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기록은 1세기 당시 진한·변한의 철·철기 생산이 수장층 주도의 조직 체계에서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한(漢) 무제(武帝)의 통제 경제 정책으로 일어난 대규모의 유망으로 빚어졌는데, 기원전 1세기 영남 각지의 분묘에서 농공구류 철기 중심으로 출토된 점과 미루어 보아 변한·진한의 철·철기 생산은 한 무제의 전매 경제 정책 실시 이후 한(漢), 조선(朝鮮) 공인(工人)들이 정착하면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들의 정착만으로 철기 생산 체계가 갖추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재지 집단의 적극적인 수용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가락국기」에 기록된 9간이 수로(首露)를 받드는 모습을 보면, 선진 기술을 가진 유이민 집단에 대한 재지 집단의 적극적인 수용 자세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철기 생산 체계는 노동력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노동력 동원이 수월했던 재지 집단 수장층의 협조하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가락국기」에 기록된 수로 집단의 도래 시기를 신뢰한다면, 가락국에서 기원전후~1세기 전반에 철기 생산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3세기에 들어서 가야의 철·철기 생산과 유통 양상은 『삼국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한조에는 일명 국출철(國出鐵) 기사가 있다. “나라에서는 철(鐵)이 생산되는데, 한(韓)·예(濊)·왜인(倭人)들이 모두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鐵)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中國)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 두 군(郡)에도 공급하였다.”라고 기록되었는데, 『위략』에는 그 문장 앞에 “변진”이 적시되어 있다. 앞의 사실은 3세기 변한이 철생산 유통 시스템이 갖추어졌음을 말해주는데, 그 중 가락국은 2세기 후반에 축조된 양동리 162호묘에서 환두대도 등 무기와 장식용 철기, 철복, 봉상철기 등 다양한 철기가 출토되었는데, 판상철부에서 변화된 철소재인 봉상철기가 대성동 45호와 같이 다량으로 확인된 점은 김해 중심의 독자적인 철·철기 생산과 유통 체계가 갖추었음을 말해준다.

한편 “국출철” 기사에 기록된 시장(市)은 고대 정치체의 시장이 거래, 매매가 항구 주변에서 이루어진 점과 권력의 통제가 이루어진 점을 고려하면 철과 같이 일정의 통제가 필요한 고부가가치의 물품 거래는 특정 정치집단의 영향력이 미치는 시장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가락국은 대외 세력이 쉽게 오가며, 정치적 통제가 가능한 즉, 왕성에 가까운 지역에 시장이 형성되었고 철교역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김해 봉황동 일대로 추정하고 있는데, 김해 봉황동의 구릉 일대는 토성이 둘러싸였고, 그 아래에는 고상 건물지군이 있으며, 배편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봉황동 일대가 시장의 형성 요건인 통제와 개방이 용이한 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시장의 존재는 철소재의 규격화 유도를 이끌었으며, 곧 대외 교역의 공정 거래가 진행되었음을 말해준다. 시장에서의 공정 거래는 상호 간의 신뢰와 공정한 교환 매개체를 통해 성립하므로 화폐가 주된 매개체이다. 고대 중국은 일찍부터 명도전, 오수전 등 실물 화폐가 발달하여 상업이 융성하였다. 가락국에서는 철을 교환 매개체로 사용하였는데, 철소재가 공정 거래를 위한 화폐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를 위해 권력 집단이 철소재를 일정한 규격으로 대량 생산하여 교환 가치를 부여하고, 시장에서의 공정 거래와 교역 활성화를 꾀하였을 것이다. 대성동 고분군, 양동리 고분군에 출토된 판상철부와 봉상철기가 일정한 규격을 갖추었고, 많은 수량이 일부 대형묘에만 부장된 점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3세기 후반~4세기 전반의 가락국의 철교역은 이전 시기와 다른 양상으로 변질하였다. 관련된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진서(晉書)』에 의하면, 동이 ○국이 내조하거나 동이교위를 거쳐 진과 교섭한 사실이에서 가락국의 철교역을 추론할 수 있다. 당시 한반도 남부의 제 세력의 대중 교섭은 중원을 직접 방문하거나 혹은 요동의 동이교위를 거쳐 대중 교섭을 행하였는데, 동이의 교섭 주체가 주도국 중심 혹은 동이 ○국으로, 제 정치체들이 함께 교섭 집단을 조직하여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이루어진 것은 교섭 거점지가 대륙 혹은 요동으로 이전되면서 이동 거리가 늘어났고, 다양한 민족이 드나들지만, 폭약고와 같은 요동에서 안전한 교섭을 위한 부대 비용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었다. 이때 구성된 한반도 남부에서는 백제국, 사로국 등이 각각 마한과 진한의 교섭 주도국인데, 『진서』에 변한의 기록이 없지만, 대성동 29호분에 동복 등 북방계 유물들이 출토된 점, 상당량의 토기, 철기가 부장된 점을 보면, 가락국이 다른 소국보다 우월한 정치·경제력을 바탕으로 일부 소국들과 결속하여 대진(對晉) 교섭을 주도하였을 것이다. 가락국이 진과의 교섭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한층 진보된 철기 제작 기술과 대량 생산 체계가 구축된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것은 3세기 후반~4세기 전반 대성동, 양동리 등 김해 지역 목곽묘에서 출토된 철기 기종이 이전 시기보다 다양해지고, 부장 수량이 급격히 늘어났으며 4세기에 이르러서는 고급 기술이 요구되는 갑주, 투구 등 고급 철기도 부장된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4세기 후반, 가락국은 여전히 상당량의 철·철기를 생산하였지만, 이전과 달리 중심이 아닌 주변부에서 철생산과 유통이 이루어졌고, 수장층에게 집중되었던 철정이 주변부의 고분군에서 확인된다. 대표적으로 가락국의 주변부인 김해 퇴래리, 창원 석동 등에서 철생산과 유통의 흔적이 출토되었는데, 가락국에서의 철생산과 유통이 점차 낙동강, 바다로의 진출이 용이한 지역으로 이전되었고, 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각종 위세품 사여가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4세기 말에 이르러 가락국과 일본열도의 철교역을 대변하는 파형 동기는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파형 동기가 갑작스럽게 보이지 않는 것은 가락국과 일본열도간의 정치·경제적 교류가 단절되었거나 소원해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복천동고분군에서 통형 동기와 함께 유자이기, 궐수문도자가 보이지 않는 점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이러한 변화는 철생산과 유통이 국가 주도의 체계가 구축되었기 때문에 가락국 수장층의 외교 정책에 의해 조정되었고, 주변국의 외교 향방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4세기 후반 가락국의 외교 양상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삼국사기』에 기록된 377년, 381년 신라가 전진을 방문한 사실과 『일본서기』에 기록된 360~370년대 백제-신라-가야-왜(倭)의 사각 관계를 통해서 가락국의 동향을 엿볼 수 있다. 381년 고구려를 통해 전진을 방문한 위두가 부견에게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시대가 변혁되고 이름도 바뀌었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점을 보면 신라의 대(對)가야 관계가 이전과 다른 양상으로 바뀌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신라가 고구려를 통해 전진과의 교섭이 이루어진 사실은 신라의 대중(對中) 해상 교역로가 가야와 왜에 의해 차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라의 동향을 344년 이후 계속된 왜의 침공, 373년 백제 독산성주의 신라 망명 사건, 360~370년대 백제-가야 제국-왜의 교섭 등과 연계하여 살펴보면 4세기대 가락국과 신라는 서로 반목과 대결을 하는 관계로 변질되어 가락국은 철생산과 유통을 조절하여 신라 등 주변과의 관계를 조정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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