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293
한자 駕洛國
이칭/별칭 가라국(加羅國),대가락(大駕洛),가야국(加耶國),금관국(金官國),금관가야(金官伽耶)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가야
집필자 이영식

[정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번성했던 고대 가야왕국.

[개설]

가락국은 『삼국유사』「가락국기」에 따르면, 김해 지역에서 서기 42년 시조 수로왕부터 532년 말왕 구형왕까지 10대의 왕이 경영했던 고대의 가야왕국이었다. ‘기락국’의 표기는 ‘가라의 나라’에서 비롯된 것으로, 1076년(문종 30)에 금관주지사가 김해 가야국의 역사를 편찬할 때 사용한 국명이었다. ‘가라’의 어원에 대해서는 ‘마을’ 또는 ‘겨레’와 같은 추정들이 있으나, ‘가라’에서 ‘가야’로 변했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김해 가야국의 역사를 편찬하면서 「가락국기」를 서명으로 했던 점,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해이사금 14년 7월 조처럼 비교적 오래된 용례로서 가라(加羅) 또는 가라(加羅) 왕자로 기록되는 점 등을 중시하여, 가락국이야말로 김해 지역 가야국의 가야인들이 사용했던 국명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락국의 성립]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42년에 수로왕의 탄강과 건국을 동시로 기록하였는데, ‘수로(首露)’는 ‘(6가야 중에) 처음 나타났다’거나 ‘(우두) 머리가 나타났다’는 뜻으로, 수로왕은 이미 6가야를 의식하였고, 그 위에 군림한다는 가락국 자존 의식의 표출로 해석되고 있다. 따라서 최초의 가락국 성립은 좀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보고, 신라 건국에서 ‘조선유민이 산과 계곡 사이에 살면서 건국하였다’는 것과 비슷한 시기와 상황으로 이해되고 있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토착의 고인돌 청동기 문화에서 도래한 고조선 유민의 목관묘 철기 문화로의 변천 과정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가락국의 발전]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는 수로왕이 제4대 신라왕이 되는 탈해의 도전을 격퇴하였고, 『삼국지』 변진전과 왜인전에서는 가락국의 철 수출과 해상 교역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러한 기록을 통해 가락국의 발전상이 확인된다. 쇠 금(金)과 바다 해(海)에서 비롯된 ‘김해’의 지명은 가락국이 철의 왕국이자 해상 왕국으로 발전하였던 흔적이 지명에 남겨진 것으로, 3세기 중후반이라는 『삼국지』의 편찬시기와 대성동 29호분에서 확인되는 외래계통의 문물들에서 ‘대국(大國)’으로서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삼한 군장의 우월한 칭호 중 하나로 확인되는 ‘구야진지(狗邪秦支)’가 가락국 우두머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가락국의 쇠퇴]

313·314년에 한(漢)의 낙랑·대방군이 축출되면서 선진문물의 공급원이 차단되기 시작하였고, 400년에 광개토왕의 고구려군과 전쟁을 겪으면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경상남도 양산시 가야진사에 얽힌 전승에 따르면 5세기 중엽부터 신라의 내물왕이 낙동강을 건너 군사를 보내어 공략하였다고 하는데, 신라가 낙동강을 건너 가락국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던 전승으로 생각되고 있다. 가라국[대가야]의 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아라국[아라가야]의 함안 말이산 고분군과 같은 고총 고분군의 부재는 이 시기 가락국 쇠퇴의 역사적 반영으로 생각되고 있다.

[가락국의 멸망]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따르면 구해왕(仇亥王) 또는 구형왕(仇衡王)은 532년에 왕실을 들어 신라에 투항하였다. 대가야처럼 전쟁을 통한 멸망이 아니라, 신라의 회유 정책에 동조하여 투항하였다. 구해왕가락국의 영역을 식읍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이후 김무력, 김서현, 김유신의 3대에 걸친 노력으로 정복국인 신라의 최정상까지 오르게 되었고, 후손의 영달을 보장받는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가락국은 금관군으로 편제되어 김해 지역의 위상이 ‘국’에서 ‘군’으로 격하되었으나, ‘가락’의 명칭은 지금도 김해·부산 지역의 지명과 축제와 같은 행정·문화면에서 사용되고 있다. 『삼국유사』 왕력에는 중국과 함께 고구려·백제·신라와 나란히 가락국의 왕계를 소개하여, 삼국 시대가 아닌 ‘사국 시대’와 같은 체제를 보여주었다.

가락국왕계는 수로왕(首露王), 제2 거등왕(居登王), 제3 마품왕(麻品王), 제4 거질미왕(居叱彌王), 제5 이시품왕(伊尸品王), 제6 좌지왕(坐知王), 제7 취희왕(吹希王), 제8 질지왕(銍知王), 제9 겸지왕(鉗知王), 제10 구형왕(仇衡王)이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