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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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海 鳳凰洞 遺蹟- 金官加耶- 王宮址 |
이칭/별칭 | 봉황대 유적,김해 회현리 패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 333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가야 |
집필자 | 조성원 |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에 있는 금관가야의 왕궁지와 관련 유적.
[개설]
김해 봉황동 유적은 전기 가야의 맹주였던 금관가야의 왕궁과 그 부속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금관가야의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김해 봉황대 유적이 김해 지역의 중심지로 성장한 것은 조개더미[구 김해 회현리 패총]에서 출토된 세형 동검이나 화천(貨泉)[중국 왕망이 세운 신나라의 동전] 등으로 보아 기원 전후한 시점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왕궁을 보호하는 시설 중 하나인 토성은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 5세기가 되어서 축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김해 봉황동 유적이 금관가야 왕궁으로서 기능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기원 전후부터 5세기 사이의 어느 시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김해 봉황동 유적에 거처했던 왕들이 묻힌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왕묘로 추정되는 무덤들이 만들어지는 것이 3세기 후반임을 고려하면, 김해 봉황동 유적은 3세기 후반부터 금관가야가 멸망하는 532년까지 왕궁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해 봉황동 유적은 사적으로 지정된 김해 회현리 패총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였던 봉황대 유적의 연관성을 고려하여 2001년 두 유적을 합쳐 재지정한 것이다.
[위치와 현황]
김해 봉황동 유적은 김해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봉황대’라고 불리는 구릉과 그 주변 일대 평지에 분포하고 있다. 봉황대는 구릉 가장 높은 중심부를 기준으로 북쪽과 동남쪽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L’형태를 띠고 있다. 구릉의 서쪽에는 해반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으며, 동쪽에는 분성산이 자리 잡고 있다. 유적의 남쪽은 열려있는데, 삼국 시대 당시 해수면을 고려하면 바다와 맞닿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봉황대를 중심으로 해반천(海畔川)에 인접한 서쪽 평지에서는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가야 시대 창고 등이 복원되어 있으며, 구릉 동남쪽에 해당하는 구 김해 회현리 패총은 발굴 조사 당시의 토층과 안내판을 이용한 패총전시관이 세워져 있다. 구릉의 동쪽은 평지로 이어지면서 주택 및 근린 생활 시설로 이용되고 있지만, 왕궁터로 알려진 부분은 사적 정비를 위해 매입 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를 진행 중에 있다. 주변 유적으로는 북쪽 약 700m 지점에 김해 대성동 고분군, 북동쪽 약 500m 지점에 수로왕릉 등 금관가야의 왕묘가 위치하고 있으며, 가야인 생활 체험촌 조성부지 내 유적, 가야의 숲 조성부지 유적 등 삼한~삼국 시대에 해당하는 다양한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또한 봉황대 구릉을 중심으로 일정 범위를 보호하고 있는 토성이 확인되고 있어, 왕궁인 봉황대를 중심으로 주변 일대가 금관가야의 중심지였음을 엿볼 수 있다.
[금관가야 왕궁에 대한 기록]
금관가야 왕궁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유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수로왕 즉위 2년(43) 정월 신답평(新畓坪)에 도읍을 정하고 1천 5백보의 외성과 궁궐, 전당, 관청, 무기고, 창고 자리를 마련해 1년 후에 완성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왕궁에 대한 세부적인 구조는 알 수 없지만, 기록으로 보아 상당한 규모의 성곽과 내부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조선 시대 각종 기록에서 ‘분성(盆城)’이라고 불리는 토성이면서 둘레가 8,683척[『증보문헌비고』], 3단[『영남읍지』]을 가지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금관가야가 멸망한 이후에도 부분적으로 흔적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궁의 위치에 대해서는 명확한 언급이 없지만, 『삼국유사』에 수로왕릉[‘수릉왕묘’라고 기술]을 궁궐의 동북쪽 평지에 조성했다는 기록으로 짐작건대 현재 봉황대를 중심으로 하는 봉황동 유적 일대임이 틀림없다. 또한 봉황대 구릉과 현 회현동 행정복지센터 사이의 평지에는 1680년(숙종 6)에 세워진 ‘가락국시조왕궁허(駕洛國始祖王宮墟)’ 비석도 있어 오랫동안 김해 봉황대 유적 일대가 금관가야의 왕궁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해 봉황동 유적 발굴조사와 성과]
김해 봉황동 유적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07년 8월 일본인 학자인 이마니시 류[今西龍]에 의해서이다. 이마니시는 봉황동 유적의 구릉 동남쪽에 해당하는 곳에서 조개더미를 확인한 후 간략한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당시 지명을 따서 ‘토목현 패총(土木峴 貝塚)’이라고 명명하였다. 같은 해 동일 지점에 대해서 시바타 쇼우에[柴田常惠]가 다시 한번 조사를 실시하여 간략한 보고를 잡지에 게재하기도 하였으나, 조개더미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1914년과 1918년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1915년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 1920년 하마다 고사쿠[浜田耕作], 우메하라 스에이지[梅原末治],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 1922년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 우메하라 스에이지[梅原末治],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1934년~1935년 가야모토 카메지로[榧本杜人] 등 일본인 학자에 의해 총 8차례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중 주목되는 것은 1918년 조사에서 확인된 청동기 시대 돌널무덤[석관묘], 1920년 출토된 중국 동전인 화천, 1934년 발굴된 소위 김해식 독무덤[옹관묘]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유구와 유물들은 금관가야 성립 이전부터 김해 봉황동 유적 일대에서 인간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과 함께 중국, 일본 등 국제 교류를 통해 성장하고 있었던 금관가야 전후 시기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중요성을 인정받아 1932년 고적 제2호 ‘김해 회현리 패총’으로 지정되기도 하였지만, 이때의 조사 결과는 ‘금석병용기’라는 한반도 문화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치부되기도 하였다. 또한 김해 봉황동 유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회현리 패총에만 집중함에 따라 금관가야 왕궁으로서의 봉황동 유적 전체를 통한 금관가야 역사에 대한 접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조사 결과는 1920년과 1922년의 것만 보고되어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는데, 거의 100년이 지난 후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일제 강점기 조사 내용을 종합한 ‘김해 회현리 패총’이 발간됨에 따라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광복 이후 봉황동 유적에 대한 첫 조사는 한참이 지나 1992년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는 봉황대 구릉과 그 진입로 개설을 위해서, 왕궁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구릉의 가장 높은 곳을 조사하여 2~5세기에 해당하는 주거지와 기둥구멍, 조개더미, 도랑 등을 확인하였다. 이 조사는 봉황동 유적 중심부에 대한 첫 조사임과 함께 왕궁의 내부를 엿볼 수 있는 각종 시설물이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지만 공원 조성을 위해 실시되었기 때문에 부분적인 조사밖에 진행될 수밖에 없어 왕궁 중심부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봉황동 유적 일대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1998년 회현리 패총, 1999~2000년 추정 궁허지와 유적 주변 일대 등의 조사 결과를 통해 김해 봉황동 유적에 대한 기초 자료가 확보되었다. 또한 2000년 이후에는 유적의 정비와 함께 주변 일대의 건축물 조성에 따른 크고 작은 발굴이 이어졌는데, 이 중 봉황대와 해반천 사이에 해당하는 서쪽 평지 부분의 김해 가야인생활체험촌 조성부지 발굴조사에서는 여러 동의 고상 창고와 경작지 등 당시까지 김해 봉황동 유적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시설이 확인되었으며, 특히 왕궁을 보호하는 토성의 일부가 조사됨에 따라 왕궁으로서의 김해 봉황동 유적이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2003년 회현동 사무소와 분성로 소방도로 개설구간, 2016년 봉황초등학교 운동장 부지, 2020년 (구)봉황초등학교 교육시설 부지 내 유적 등 봉황동 유적의 동쪽과 남쪽 외곽에서 진행된 수 차례 발굴 조사에서 토성의 흔적이 잇달아 확인되면서 왕궁을 둘러싼 봉황토성의 축조 기술과 그 범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연구자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봉황토성은 봉황대 구릉을 중심으로 주변 일대의 평지를 둘러싼 오각형이라는 점은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축조 시기는 성벽 조사에서 출토된 유물로 볼 때 5세기로 추정되고 있다. 토성을 쌓기에 앞서 구릉을 제외한 왕궁 일대의 연약한 뻘층을 보강하기 위해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을 박는 말뚝지정, 점토와 나뭇잎이나 나뭇가지를 교대로 쌓아올리는 부엽공법, 바닥을 불다짐하는 방식 등 다양한 기술을 활용해 지반 보강 기술이 이용되었다. 그 후 사질토와 점질토, 조개껍질이 포함된 흙을 여러 차례 쌓아 올리면서 불다짐하고, 내벽과 외벽을 45도 가량 깎아낸 후 아래에서부터 돌을 2단 내지 3단으로 쌓아 올리는 과정을 4회 가량 반복하고 최종적으로 점토를 발라 견고한 성벽을 완성하였다. 지금까지 전기 가야의 맹주였던 금관가야는 5세기가 되면서 급격하게 쇠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 같은 우수한 토목 기술로 거대한 토성을 쌓을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가야의 중심세력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광복 이후 이루어진 약 70여 차례의 발굴 조사는 금관가야 왕궁으로서 김해 봉황동 유적을 바라볼 수 있는 각종 시설과 토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였으며, 이는 금관가야를 다른 삼국과 함께 고대국가로 재평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대부분의 발굴 조사가 개발과 관련된 것으로, 제한된 공간 내에서만 진행됨에 따라 금관가야사를 복원하기 위한 봉황동 유적의 전반적인 검토는 진행될 수 없다는 한계도 있다.
따라서 금관가야 왕궁지로서의 봉황대 유적의 성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금관가야사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발굴조사와 복원계획이 필요하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김해시에서는 2007년부터 ‘금관가야 궁허지’로 알려진 봉황대 구릉 동쪽 일대의 평지를 매입하였고, 2015년부터는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봉황동 유적에 대한 중장기 조사 계획을 수립하여 본격적인 발굴 조사에 착수하였다. 지금까지 발굴 조사에서는 청동기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는 여러 시대의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었지만 아직 왕궁과 관련된 흔적은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금관가야 때 이 일대의 저지대를 활용하기에 위해 조개껍데기와 흙을 매립한 흔적이 확인되어, 금관가야의 성장과 함께 왕궁의 공간을 확장하려한 모습을 확인한 점은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형 건물지로 추정되는 기둥 구멍[주혈], 의례를 위한 구덩이와 각종 생산 시설 등도 서서히 확인되고 있으며, 집모양 토기나 제사를 위해 만든 소형 토기 등 특수 용도로 제작된 토기도 출토되고 있다. 이는 왕궁 내부에 왕을 위한 다양한 시설이 존재했으며, 제의와 같은 다양한 중요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향후 발굴 조사의 진전에 따라서 더욱 선명한 금관가야 왕궁의 모습을 그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외에 사적으로 지정된 김해 봉황동 유적의 범위에서는 벗어나지만, 북쪽에 위치한 ‘한옥생활체험관 건립 예정부지 유적’에서는 금관가야 당시의 주거지와 토기 가마 및 공방, 제방 등의 다양한 시설물이 확인되었으며, 봉황대 구릉의 남쪽 평지에 해당하는 ‘봉황동 119-1번지 주택 신축 부지 내 유적’에서는 삼국 시대 선박의 측면 부재와 노 등도 출토되었다. 또한 ‘김해 원도심 도시재생사업 부지 내 유적’에서는 4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걸친 문화층과 함께 일반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대형의 적심 건물지가 조사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발굴 조사 결과는 금관가야의 왕궁을 포함한 금관가야 도성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
[김해 봉황동 유적의 역사적 의의와 향후 과제]
김해 봉황동 유적은 전기 가야의 맹주였던 금관가야의 왕궁지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 실체는 불분명하였다. 그래서 1990년대 금관가야 수장묘가 모여있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발굴조사에서 다른 삼국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무덤 규모와 화려한 유물이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고대국가로서의 금관가야 모습은 퇴색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광복 이후 현재까지 약 70여 차례에 걸쳐 진행된 김해 봉황동 유적의 발굴 조사를 통해 우수한 토목 기술로 축조된 토성과 다양한 시설을 갖춘 공간이 확인되면서 금관가야 왕궁에 대한 복원이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이러한 발굴 조사 결과를 이용해 금관가야 왕궁의 내부 공간 구성과 활용, 삼국 시대 당시 왕궁을 둘러싼 주변 경관 등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김해 봉황대 유적이라는 왕궁을 중심으로 이를 보호하기 위한 토성, 그 외부에 경작지와 무덤 등이 일정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이러한 배치는 강력한 왕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연구는 오래전부터 주목 받았던 백제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신라의 월성 등 다른 삼국에 비하면 아직 시작 단계에 지나지 않지만, 최근 가야 각지에서 확인되고 있는 여러 가야의 왕성과 함께 고대국가 중 하나로서 금관가야를 이해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금관가야의 왕궁인 김해 봉황동 유적은 가야 문화의 출발을 알리는 곳이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김해 봉황동 유적과 그 일대에 대한 발굴 조사는 수십 차례 진행되어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대부분 개발에 의해 좁은 면적만 진행되었기 때문에 금관가야 왕궁에 대한 전모를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봉황동 유적의 사적 지정 범위 뿐만 아니라 주변 일대는 이미 도심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많은 부분이 훼손된 상태이므로, 유적에 대한 보호와 전면적인 발굴조사가 시급한 상황이다. 또한 향후 금관가야 나아가 가야사 복원의 핵심 유적이라고 할 수 있는 김해 봉황동 유적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계각층의 논의를 거쳐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해야 하며, 학제 간의 종합적인 연구를 통해 다각적인 접근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