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2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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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官伽耶 |
이칭/별칭 | 가락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가야 |
집필자 | 김양훈 |
[정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성립한 가락국의 또다른 이름.
[기록 속의 금관가야]
금관가야는 현재 김해 가락국을 지칭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되지만,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다. 금관가야는 『삼국유사』 오가야조에 의하면, “『본조사략』에는 태조 천복 5년 경자에 다섯 가야 이름을 고쳤는데, 첫째가 금관…”이라고 했을 뿐, ‘금관가야’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6세기 후반~7세기 전반 신라에서 가락국을 지칭할 때 불렸던 금관(金官)과 가야(伽耶)가 조합된 조어(造語)로 고려 전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합리적일 것이다. 금관가야는 당대의 실상을 보여주는 국명이 아니기 때문에 사용을 지양해야 할 용어라 할 수 있다.
[고고학에서 본 금관가야]
금관가야는 고고학계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으며, 6가야 중 하나의 고대 정치체로 인정하고 있다. 그것은 고고 자료에서 보이는 가야 문화의 독특한 지역적 특색을 통해 구분되는 문화권을 정치적 권역과 동일시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금관가야의 권역에 대해 문헌에서는 현재 김해시 일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고고학적으로는 4세기대에 유행한 외절 구연 고배(外切 口縁 高杯), 파수부노형 기대(把手附爐形 器臺) 등의 금관가야 양식 토기 분포상을 권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지역으로 보면 현재 경상남도 김해시를 중심으로 부산광역시 일부, 창원시 진해구, 양산시가 해당된다.
이와 달리 4세기대 김해와 부산 지역에서 확인된 대형 목곽묘, 금관가야 양식 토기, 통형 동기(筒形 銅器)가 보여주는 고고학적 유사성을 근거하여 김해-부산의 고대 정치체가 ‘금관가야 연맹체’를 이루었고, 김해 대성동 집단이 중추부이며 그 아래에 김해 양동리 집단과 부산 복천동 집단을 두는 견해도 있다.
한편 삼한과 삼국의 정치체 성격을 각각 국(國)단계와 국가(國家)로 구분하여 기원전 1세기~기원 전후에 세워진 구야국이 2세기 후반 혹은 3세기 후반에 이르러 국가 단계의 금관가야로 성립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