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공단, 김해 산업화를 선도하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012
한자 安洞工團 金海 産業化- 先導-
영어공식명칭 Andong Industrial Complex, Leader of the Gimhae Industrialization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인성호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안동 지역에 있으며 김해시 산업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공업 단지.

[들어가면서]

김해시는 경상남도의 대표적 산업 도시 중 하나로 알려졌지만 1950년대까지 지금의 모습과는 다르게 농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한국 최대의 삼각주인 김해평야가 있을 뿐만 아니라 따뜻하고 벼가 잘 자라는 기후 조건을 지녔고, 낙동강을 통한 물류 유통이 매우 편리하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경상남도를 넘어 한국의 대표적 곡창 지대로서 그 역할을 다하였다.

하지만 2010년 기준으로 김해시의 총생산 지표를 보면 약 절반이 제조업에서 나올 만큼 현재의 김해시는 고도로 산업화된 도시이다. 2022년 기준으로 김해시 내에 조성 중인 산업 단지를 포함하여 산업 단지만 20개가 넘게 있고, 외국인이 서울 다음으로 많이 사는 도시로 여러 대형 외국 기업도 있다.

그렇다면 김해시의 본격적인 산업화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논과 밭, 그리고 염전만 있던 1950년대의 김해시가 현대의 첨단 도시로 발전하도록 앞장선 주인공은 바로 한일합섬안동공단이다. 부산-김해경전철김해대로를 따라가면 만날 수 있는 김해시 삼안동은 삼방동안동이 합쳐져 생긴 행정 구역으로, 그중 시가지와 상업 지구, 여러 제조업체들이 함께 뒤섞여 있는 삼안동의 남부에 안동공단이 있다. 지금은 매우 번화하고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이지만 안동공단이 조성되기 전인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김해평야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야산의 단순한 경작지였다.

[한일합섬, 김해에 공장을 설립하다]

농업 지역 김해가 공업화되는 과정은 한일합섬 창업주 김한수가 김해 안동 지역에 공장을 설립하여 성장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한일합섬은 김해 출신 사업가인 김한수가 설립한 기업으로 아크릴, 폴리에스터와 같은 화학 섬유 등을 제조하는 섬유 산업을 전개하였다. 김한수는 1922년 당시 김해군 명지면 동리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혼슈 중서부에 있는 오사카[大阪]에 살던 큰누나 부부의 도움으로 고노하나야간상업학교를 다녔다. 낮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포목점에서 일하며 경험을 쌓았고 밤에는 학업에 집중하는 생활을 하였다. 이때의 경험이 훗날 김한수가 운영하게 될 기업을 만드는 데에 큰 포석으로 작용하였다. 김한수는 고노하나야간상업학교를 졸업한 1940년에 곧바로 포목상을 마련하여 운영하기 시작하였지만, 사업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44년 태평양전쟁이 점점 치열해지고 일본에서 사업을 하기가 어려워지자, 김한수는 온 가족을 데리고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

김해로 돌아온 이후에도 김한수의 사업가적 기질은 멈출 줄 몰랐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김한수는 사업지를 부산으로 이전하여 각종 복지류와 직물류의 도매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사업이 점점 발전되자, 1953년에 부산 국제시장 안에서 한천(寒天) 수출과 양복지 수입을 주력으로 하는 대경산업을 설립하였다. 대경산업이 계속 번창하자, 경남모직공업으로 확장되었다.

1960년대에 박정희 정부가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추진하며, 이와 맞물려 전 세계적으로 아크릴, 폴리에스터와 같은 화학 섬유의 소비가 늘어나자, 화학 섬유는 자연스레 한국의 주요 수출 상품으로 떠올랐다. 김한수는 이와 같은 시대적 흐름에 발맞추어 1963년 한일합섬공업을 설립하고, 화학 섬유 제조업을 시작하였다. 처음부터 김해 지역에 한일합섬 공장을 설립한 것은 아니었다. 한일합섬의 첫 번째 공장은 1966년 말 마산시 양덕동에 설립되었다. 해외 차관을 통해 재정을 조달하고, 일본에서 방적 기계를 들어와 합성 섬유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공장 가동이 시작되는 시기만 해도 약 4,030명의 노동자를 보유한 큰 규모의 사업체였다. 마산 공장에서 생산되는 합성 섬유 브랜드인 ‘캐시밀론’의 이름을 알리며 사업적으로 번창하기 시작하였고, 1968년 1월 김한수의 고향 김해에 방적 공장인 한일합섬 김해공장이 건설되었다.

한일합섬의 방적 공장이 김해의 안동에 개설된 것은 김해의 산업화를 선도한 안동공단 조성의 시작을 의미한다. 한일합섬 김해공장이 설립될 당시의 김해 지역에는 공업 시설이라는 것이 거의 없었고, 김해시의 주도로 공장 부지에 개설된 것이 아니었다. 야지(野地)에 불과하던 안동 인근은 당시에 교통 및 인프라가 거의 형성되지 않았지만, 한일합섬 김해공장을 시작으로 공장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점차 근로자들이 많아지면서 인근도 함께 발전하게 되었다. 한일합섬 김해공장은 설립 초기에 정방기 100대와 직기 105대를 설치하여 가동하였다. 그 후로 지속해서 확장되었고, 1986년 초반에 정방기 196대와 7만 7280추 규모의 최신 생산 설비를 갖추게 되었다. 설립 당시 한일합섬 김해공장에는 총 374명[남성 321명, 여성 53명]이 고용되었다. 1969년 한일합섬 김해공장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고용 인원이 거의 2,000명으로 늘어났고, 1973년에 7,127명으로 급증하였다. 이후 한일합섬 김해공장 인근이 안동공단으로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김해 경공업의 심장부 안동공단의 흥망]

한일합섬 김해공장이 자리 잡은 안동공단의 형성은 한국의 다른 공업 단지의 조성과 다르게 이루어졌다. 안동공단은 처음부터 국가가 주도하여 계획적으로 조성한 것이 아니라 한일합섬 김해공장의 건설을 계기로 주위에 다른 공장들이 점차 모여들면서 형성되었다. 안동공단은 사실상 거의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비법정 공업 단지였다. 그런데도 안동공단은 2000년대 초까지 삼방, 어방, 지내, 안동 지역에 걸쳐 약 2㎢에 이르는 대규모 공업 지역을 형성하였으며, 이것은 김해시가 산업 도시로 변모할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수치이다.

2023년 현재 안동공단은 도시 개발 및 환경과 관련하여 김해의 발전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지만 개발 당시에는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 정책에 편승하여 김해를 농업 지역에서 공업 도시로 변모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쉽게도 안동공단 초창기 형성 과정을 기록한 직접적인 자료가 거의 전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 양상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1977년에 김해시 내에 있던 공장 수가 18개였고, 1980년에 49개로 늘어났다는 김해시의 통계 자료를 근거로 하면 한일합섬 김해공장이 가동되고 10년 정도 지난 1970년대 후반이 되면 이미 상당히 많은 공장이 안동공단에 밀집하고, 김해 지역에 공장들이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1982년 김해시의 통계를 보면 김해 지역 내에 있는 총 59개 공장 중 42개 공장이 안동공단이 있는 삼안동에 모여 있었으며, 70%가 넘는 비중이었다. 이에 발맞추어 자연스레 공장 노동자들이 안동공단의 인근으로 몰려들면서 주거촌이 형성되었다. 1982년 기준으로 김해시 내의 공장 종업원 수는 8,507명이었으며, 그중에 7,928명이 안동공단 공장에 근무하였고 이는 90%가 넘는 비중이다.

또한 안동공단에 자리한 제조업 공장들의 업종도 주목되며, 특히 섬유 산업과 기계 산업의 공장 증가가 두드러졌다. 섬유 산업 관련 공장은 최초로 입성한 한일합섬 김해공장의 영향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기계 공장의 증가는 인근의 창원기계산업공단이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된 것과 관련이 있다. 섬유 산업과 기계 산업 이외에도 다양한 업종의 공장이 우후죽순으로 형성되었으며, 이는 안동공단의 자연 발생적 성격을 잘 보여 준다. 이러한 확장세는 1980년대 이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기존의 안동[삼안동]과 인접한 어방동까지 공단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안동·어방공업지역’으로 불리게 되었고, 1990년대에는 삼계 지역이 준공업 지역으로 정식 분류가 되었다. 이처럼 안동공단은 농촌이던 김해 지역의 체질을 점점 산업 도시로 바꾸어 나갔다. 김해 지역 산업화의 선봉장이자 성장 동력 역할을 한 것이다.

김해시 공장 근로자들이 대부분이 안동공단에 모여 있던 만큼 근로자들의 삶의 모습도 주목할 만하다. 공단 내에서도 대형 공장이던 한일합섬 김해공장 노동자들의 모습이 기록에 남아 있다. 1974년 한일합섬은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을 수료한 이후 ‘새마을운동추진본부’를 구성하였고, 공장 새마을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당시 상공부가 지정한 공장 새마을운동 시범 업체로 선정되었다. 1975년에 회사 차원에서 자체 새마을연수원을 건립하였고, 1978년에 한일합섬 김해공장에서 공장새마을추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또한 회사 내에서 공장 공원화 사업도 진행하였다. 또한 한일합섬 김해공장에서 1972년에 직장 민방위대가 발족되었고, 1975년에 사내 예비군 경연 대회를 겸한 체육 대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당시는 국가와 기업의 발전을 우선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하던 만큼 노동자들의 모습도 현대와는 사뭇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활동도 전개되었다. 1975년 5월 20일에는 한일합섬 김해공장에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노동조합은 매년 개최되는 정기 대의원 대회에서 모범 조합원을 표창하고, 노사 협의회를 통해 다양한 안건을 토의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노동조합의 주요 활동은 노사 협의회를 통해 불편 사항 등을 회사에 건의하고 토의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안동공단은 이처럼 김해시의 산업화를 가장 앞장서서 선도하였으며, 그 속에서 발생하는 생생한 성장통을 겪으며 1990년대까지 계속해서 확장하였다.

[중공업으로 변신을 시도하다]

김해 지역의 공업화는 1980년대 이후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대표적으로 한일합섬 김해공장의 규모가 확대되었고, 흥아타이어, 국제상사 등 대기업의 공장들이 안동공단에 진출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는 소규모 공장들도 빠르게 증가하였으며, 부산의 사상공단을 비롯한 주변 도시의 제조업체들이 김해로 확장 이전하였고, 창원의 국가 산업 단지의 협력 업체들이 대거 유입되기도 하였다. 모두 한일합섬을 필두로 한 경공업 중심의 성장이었고, 안동공단과 김해 산업화의 성장세는 계속해서 이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초창기 안동공단의 성장을 주도한 섬유와 신발 등의 경공업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김해 지역의 공업화에도 어려움이 발생하였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1990년대에 섬유 산업 시장이 점차 후퇴하면서 한일합섬은 사업 규모의 축소가 불가피하였고, 합성 섬유 산업의 감소와 함께 한일합섬 김해공장은 경상남도 의령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안동공단의 시작인 한일합섬 김해공장의 이동이 신호탄이 되었고, 이어서 경공업 제조 공장들이 점차 줄어들면서 그 빈자리를 자동차, 기계 부품 등 중공업 관련 공장들이 채워 나갔다. 이로 말미암아 1990년대 중후반부터 자연스럽게 금속, 기계 부품 산업이 김해 공업화의 핵심이 되었다.

1990년대부터 이루어진 김해 지역 공업의 체질 전환은 김해시 전체의 산업화로 본다면 확실히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김해시의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보면, 1999년에 사업체 수가 1,800개이었고 공장 노동자 수가 3만 8893명이었으며, 이 수치는 2000년대 초중반에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다가 2006년에 정점으로 치닫는다. 2006년 기준으로 사업체 수가 3,261개이었고 노동자 수가 6만 4469명이었다. 6년간 사업체 수가 180%, 노동자 수가 170%가량 증가하였다. 출하액은 1999년과 비교하였을 때 300%가량 증가하였다.

2007년부터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의 영향으로 김해의 경제 지표가 감소하였지만 2010년대에 들어와서 다시 회복되었고, 김해는 중공업 중심의 제조업이 주도하는 공업 도시로 자리매김하였다. 또한 김해 지역은 주변 지역인 울산과 거제의 조선, 자동차, 기계 산업의 성장과 연계하여 성장하였다. 21세기에 들어와서 김해 지역의 제조업 중심적인 도시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고, 2010년에는 제조업이 지역 경제 생산의 50%를 차지하게 되었다.

[나오면서]

안동공단은 야지에 불과하던 김해시 안동 지역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김해 지역의 발전을 선도하였고, 김해를 농업 지역에서 공업 도시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안동공단은 국가 주도의 계획적 조성이 아닌 개별 공장들이 모여 형성된 지역이라는 태생의 한계로 말미암아 조성 초기부터 도로와 상하수도 등 공단 기반 시설이 비교적 취약한 상태였다. 또한 안동 지역에 공단이 들어서며 사람이 모여들어 자연스레 안동공단을 둘러싸는 도심지가 생겨났으며, 이후로 1979년대부터 40여 년간을 버텨 온 안동공단의 낙후된 시설들은 이 도심 지역의 개발에 장애가 되는 형태로 변해 갔다.

김해시 산업화의 선봉장이던 안동공단은 이제 미래 세대를 위해 물러날 때가 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산업화가 진행되던 1980년대부터 이미 안동공단의 위치 때문에 도시의 균형 발전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조금씩 제기되기도 하였다. 또한 김해의 산업화와 도시 개발로 지역 간의 불균형과 시민들의 일체감 부족이라는 문제도 나타났다. 특히 도심, 농촌, 동서 지역의 불균형은 도시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지적되었다.

김해시는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안동공단의 재개발 계획을 수립하였다. 비용 문제로 실행이 지체되었지만, 계획 자체는 안동공단 내에 운영 중인 공장들을 모두 주변의 적합한 산업 단지로 이주시키고 공단 부지를 단계적으로 개발하여 복합 도시를 조성한다는 것으로 차근차근 수립되었다. 그러다 2016년에 해당 지역이 국토교통부 주도 사업을 통해 ‘투자선도지구’로 선정되어 2017년 성은개발과의 협약으로 도시 개발 사업이 추진되기로 결정되었다.

2019년에 사업 계획이 승인되어 기존의 50여 개의 공장은 인근 산업 단지로 이전이 계획되었고, 재개발 완료 후에 약 9,000명의 고용 창출과 지역 경제 활성화를 기대하였다. 안동공단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지 몰라도 그 위로 새롭게 올라올 도시는 고용을 창출하고, 김해시의 성장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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