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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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海 鄕校- 儒學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석태 |
[정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의 역대 향교 설립과 유학의 발전.
[개설]
향교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유학을 교육하고, 공자와 사성십철(四聖十哲), 송나라와 우리나라의 역대 유현(儒賢)을 제향하기 위해 국가가 지방에 설립한 교육 기관이다. 고려는 도성에 국학을 두고 지방의 주요 고을에 향학을 두어 교육하였다. 1003년(목종 6) 3경 10목에 설치한 향학은 한국 향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1127년 인종이 조서를 내려 지방의 주에 학교를 설립하고, 군현에도 학교를 설립하게 한 것이 한국 향교의 출발이다. 김해의 향교도 이때 처음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사실은 이곡(李穀)의 「김해부 향교 수헌기(金海府 鄕校 水軒記)」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이 된다.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며 유학 교육을 특히 중시하였다. 전국 모든 고을에 향교를 설립하여 유학을 교육하고, 공자 이하 역대 유현을 제향하면서 지역민을 교화하였다. 그리고 학전 등을 통해 향교를 유지할 재정을 확보해 주는 한편, 중앙에서 교육을 전담할 관인으로 도호부 이상에는 문과 급제자로서 종6품 교수를 파견하고, 그 이하 고을에는 종9품 훈도를 두었다.
조선 전기 김해에는 고려 후기 이래 존속했던 향교를 토대로 김해시 대성동 현 향교 가까운 곳에 김해향교가 설립되었다. 임진왜란으로 건물이 모두 소실됐지만 곧 복원하였고, 1683년 향교 뒷산이 무너지자 현재 자리로 옮겨 건립하였다. 도호부에 어울리는 규모와 넉넉한 재정을 갖추고 교육하는 한편, 향약 시행을 통해 지역민을 교화하였다. 김해향교가 지역 문교의 중심으로 발전하는 데는 김해 김씨를 위시한 김해 유력 사족 가문의 역할이 컸다.
[조선 전기 김해의 유학]
조선 시대 김해 지역에는 전래 4대성 창녕 조씨·광주 노씨·김해 허씨·청주 송씨와 김해 김씨·광주 안씨·의성 김씨·재령 이씨·문화 유씨 등이 강력한 재지 기반을 갖춘 사족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중 초기에는 김해 김씨가 특히 두드러졌는데 김조(金銚)·김계금(金係錦)·김계희(金係熙)·김극검(金克儉) 등이 중앙에 출사하며 크게 흥성하였다.
김계금과 삼종제 김계희는 김해에 충절과 퇴은(退隱)의 중요성을 깊이 각인시켰다. 김계금은 1454년 문과에 급제했는데, 이듬해 사육신 사건으로 많은 사림이 희생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단종에 대한 충절과 의리를 지켰다. 세상에서는 생육신에 한 사람을 더할 만하다는 뜻으로 육일거사(六一居士)라고 일컬었다. 김계금의 호 ‘서강(西岡)’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薇蕨]를 캐 먹다 굶어 죽은 백이·숙제의 고사에서 온 것이다. 사후 묘소 주변에 전에 없던 고사리가 자라나 묘소가 있는 고개를 궐현(蕨峴)이라 하고, 김계금을 제향한 서원을 미양서원(薇陽書院)이라 하였다.
김계희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을 거쳐 한성부윤을 역임한 다음,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김해 화포천 가에 정자를 짓고 한가롭게 지내는 고상한 풍도를 보였다. 세상에서는 김계희가 벼슬에서 물러나 지내던 정자를 김계희의 첫 벼슬인 예문검열의 이칭 한림(翰林)을 붙여 한림정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김해 한림면의 이름이 유래했다고 전한다.
김해 김씨 출신으로 지역에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김일손과 장조카 김대유(金大有)도 있다. 김일손은 비록 그 선대에 이미 청도로 이주했지만, 여전히 김해에 재지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김일손을 통해 길재,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학문과 의리 사상이 김해에 전파되고 또 뿌리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 김해의 유학 발전과 남명학파 형성에 중요한 사람은 김대유이다. 김대유는 무오사화로 숙부 김일손이 화를 당했을 때 부친과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 1519년 현량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내다가, 기묘사화로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직과 급제가 모두 삭탈 된 뒤, 청도 동창천(東倉川) 가에 삼족당(三足堂)을 짓고 은거하였다. ‘산림의 고사(高士)’로 지칭한 조식을 위시한 경상우도 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후일 남명학파로 귀일된 인물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조식과 평생 망년의 벗으로 깊은 교류를 나누며 김해 산해정에서 은거 강학하던 중장년 시기 조식의 사상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김대유와 함께 조식의 사상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친 또 한 사람은 밀양 사포(沙浦)에 은거했던 신계성(申季誠)이다.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오로지 학덕(學德)을 닦은 포의(布衣)의 처사였다. 조식은 신계성의 묘갈명에서 자신을 위시한 산림처사 중 최고이자 성인 공자의 경지에 다가선 인물로 높이 칭송하였다. 김대유와 깊은 교류를 나누었고, 조식이 일찍이 신계성을 스승으로 해서 학문을 닦았다고 알려져 있다.
김대유·신계성·조식 세 사람에다 ‘영중삼고(嶺中三高)’로 일컬어진 합천의 이희안(李希顏)을 더해 본다면, 후일 남명학파는 밀양강과 황강 등 경상우도 지역 낙동강 여러 지류 주변 산림에 포진해 있던 인물들의 학문적 움직임이 김해 낙동강 강가에서 멀리 남해를 전망하는 조식에게로 귀일하여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김대유·신계성·조식·이희안 등과 학문적·혈연적으로 깊이 연계된 가문은 조식의 강학지 김해만이 아니라 청도·밀양·양산·합천·함안·창원·창녕·진주·의령·산청·거창·성주·고령·현풍 등 경상우도 지역에 폭넓게 포진하고 있었다. 이것이 후일 조식의 중장년 강학지 김해 산해정을 모체로 조식과 신계성을 병향(並享)하는 신산서원을 창건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신산서원의 창건과 주자학의 발전]
조선은 건국과 함께 중앙에 성균관, 지방 각 고을에 향교를 두어 학문과 교육이 중앙의 통제하에 관학을 중심으로 행해질 수 있도록 법제화하였다. 이것은 한편으로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는 방편이면서, 한편으로는 새로 건국된 왕조의 수요에 부응할 관료를 양성하려는 조처였다. 그러나 조선이 국시로 내건 주자학 이념에 입각할 때, 왕조의 수요에 부응할 관료를 양성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될 수는 없었다. 성현이 되기 위한 공부를 하는 것, 요즘의 입시 교육이 아닌 ‘참교육’을 행하여 참된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 교육의 목표였다.
조선 전기 4대 사화를 거치며 주자학 이념이 사회 전반에 뿌리를 내리게 되자, 선비들은 관료 양성을 목표로 하는 관학 성균관과 향교를 점차 외면하고, 벼슬길에서 물러나 전국 각지에 은거해 강학하던 학덕 높은 선생의 정사나 서당으로 찾아들었다. 김해·합천·산청 등지에 은거해 강학하던 조식의 산해정·뇌룡정·산천재나 예안에 은거해 강학하던 이황의 도산서당으로 학문에 뜻을 둔 선비들이 몰려든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신산서원은 조식의 중장년 강학지 김해 산해정을 모체로 산림처사로서 실천궁행하는 조식의 도학 정신을 구현할 터전으로 창건되었다. 1588년 김해부사 양사준(楊士俊)과 안희(安憙) 등 지역 사림이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탄통(炭洞) 산해정 동쪽 신어산 기슭에 창건하여 조식을 제향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신산서원과 산해정이 모두 소실되자, 1609년 김해부사 김진선(金振先)과 안희·황세열(黃世烈)·박수춘(朴壽春)·허경윤(許景胤)·배홍우(裵弘祐) 등 지역 사림이 산해정 옛터에다 중건하고, 같은 해 조식의 만년 강학지 두 곳에 창건된 산청의 덕천서원 및 합천의 용암서원과 함께 사액을 받아 명실상부하게 경상우도 지역 남명학파 3대 본산의 하나가 되었다. 1616년 신계성을 함께 제향하였다.
신산서원은 김대유, 신계성, 조식으로 이어지는 산림처사 계열의 학문적·혈연적 기반을 토대로 창건되었다. 특히 초기에 정인홍의 제자를 중심으로 설립과 중건이 추진되고, 또 사액이 이루어지면서 조식이 사문(師門)의 종지를 정인홍에게 전수했다고 일컬어지는 「대학팔조가(大學八條歌)」[「격치성정가(格致誠正歌)」]를 조식의 학문 요체로 높이 받들 정도로 정인홍의 영향력이 지대한 서원이었다. 1610년 조식의 위패를 봉안하고 1616년 신계성의 위패를 봉안하면서 서원에 적을 둔 유생만 70여 명에 이르고, 김해만이 아니라 청도·밀양·양산·합천·함안·창원·창녕·진주·의령·산청·거창·성주·고령·현풍 등 경상우도 지역에 두루 걸치는 큰 서원으로 발전하였다.
신산서원은 초기 모습을 온전하게 살펴볼 수 있는 「신산서원 입규」가 남아 있다. 1620년대 초반 원장을 지냈던 이명호(李明怘)가 작성한 것인데, 이이의 「은병정사 학규(隱屏精舍學規)」와 「은병정사 약속」 등을 참고하여, 원장·유사·유생 등 서원의 인적 구성과 그 역할, 서원의 입학 자격과 절차, 서원의 교육 목표와 내용, 서원의 의식과 절차, 서원 내외의 생활과 상벌 규정 등 서원 관련 모든 내용을 규정해서 학규를 작성하였다. 무엇보다 서원이 과거를 위한 공부가 아닌 성현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학문을 익히는 공간임을 분명히 하고, 그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서원 생활에서 유생들 행동 하나하나를 엄격하게 규율하는, 말 그대로 쇄소응대(灑掃應對)의 하학(下學)에서 성현으로 상달(上達)하려고 한 조식의 뜻이 잘 관철되어 있다. 나아가 그러한 목표를, 서원을 중심으로 하나의 학문 결사체를 형성한 집단의 자율적인 행사를 통해 실현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짜 놓았다. 즉, 서원이 정치 권력의 행사기관이 아닌 순수한 학문 결사체라는 서원 설립의 본래 취지를 충실하게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학규를 제정한 정인홍과 제자들이 북인으로 정치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면서, 그 취지를 현실에서 제대로 실현해 보지 못한 채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북인 정권이 무너지고 정인홍이 사사되면서, 경상우도 지역에 폭넓게 분포했던 정인홍 제자 가문을 포함한 정인홍과 학문적·혈연적으로 연계된 가문들이 쇠락하거나 정인홍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가자 그 경제적 기반이 축소되고, 나아가 학문적 기반도 함께 축소되고 말았다. 창건 초기 중앙정계와 연계된 전국적인 영향력을 가진 사액서원에서 김해 지역의 한 서원으로 그 위상이 조정되었다.
그 후 신산서원은 창녕 조씨·청주 송씨·김해 허씨·광주 노씨·김해 김씨·광주 안씨·의성 김씨·재령 이씨·함안 조씨·현풍 곽씨·진주 강씨 등 김해 유력 사족 가문이 자신들의 경제 기반과 인적 기반을 토대로 향사와 강학을 주도하게 되자, 그 가문들의 학문적 경향에 따라 이현일(李玄逸)에서 이상정(李象靖)으로 이어지는 영남 퇴계학파의 서원, 조식의 정신과 이황의 학문을 결합한 서원으로 발전하였다. 1866년에는 근기남인(近畿南人)의 종장 허전(許傳)이 김해부사로 원장을 맡으면서 영남 퇴계학파의 학문과 근기남인의 학문을 결합한 서원이 되었고, 나아가 근기남인의 비조인 정구(鄭逑)로 거슬러 올라가 퇴계학파의 이론적 학풍과 남명학파의 실천적 지향이 조화롭게 통합된 서원으로 새롭게 발전할 계기를 마련하였지만, 뒤이은 훼철로 더 이상 향사와 강학이 어렵게 되고 말았다.
김해에는 신산서원 외에 조선 시대에 창건된 서원으로 미양서원·송담서원(松潭書院)·구천서원(龜川書院)·물봉서원(勿峯書院)·예암서원(禮巖書院) 등이 있다. 이 다섯 개 서원에 제향한 김계금·송빈·이대형·김득기·허경윤·조구령·조이추 일곱 분을 ‘김해 향사칠현(鄕社七賢)’이라고 한다. 이들은 조식 외에 김해의 유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여 김해 지역 서원에 제향되고 있다. 노필연(盧佖淵)이 「김해향사 칠현열전」을 지어서 그 행적을 널리 선양하였다. 김계금은 김일손과 조식 이전에 김해에 충절과 퇴은의 중요성을 깊이 각인시켰고, 송빈·이대형·김득기는 사림파의 의리 사상과 산림처사의 도학 정신을 전란의 현장에서 몸소 구현했으며, 허경윤·조구령·조이추는 신산서원의 중건과 수호에 헌신한 인물이다.
1871년 신산서원이 훼철된 뒤에도 김해 선비들은 여전히 조식이 사문의 종지를 정인홍에게 전수했다고 하는 「대학팔조가」를 조식의 학문 요체로 가슴 깊이 기억하고 그 정신을 되살려갈 길을 도모하였다. 이 사실은 1890년 노수용(盧壽容)이 지역 선비 조영환(曺泳煥)·하경도(河慶圖)·허찬(許燦) 등과 함께 산해정을 중수해서 조식을 향사하게 되었을 때, 월삭(月朔) 강회를 열면서 먼저 서원 유생에게 「대학팔조가」를 외우게 했던 것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그 정신은 비록 서원의 훼철로 신산서원에서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후일 김해 출신이자 허전의 적전 노상직(盧相稷)의 자암서당(紫巖書堂)에서 실현되었다.
[근대 김해의 서당교육 성행과 새로운 서원의 출현]
근대 김해 지역에는 서당 설립과 그와 관련한 유계회(儒契會, 學契) 결성이 성행하였다. 이것은 허전이 행했던 강학 활동과 그를 통해 지역의 유학을 진작시킨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허전은 1866년 김해부사로 부임해서 양사재(養士齋, 就正齋)를 활성화하고, 공여당(公餘堂)을 개방해 강학하자, 김해만이 아니라 경상도 여러 지역 선비들이 문하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허전이 떠난 뒤에도 노필연 등 김해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취정계’를 조직하고, 그 이후에는 또 ‘취정보유계(就正補遺契)’를 결성하여 그 학문을 계승해 가려고 하였다. 이것이 신산서원의 학문 전통을 이어서 또 다른 김해의 학문 전통이 되면서 근대 이후, 특히 일제 강점기에 서당의 설립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유계회의 결성이 몹시 성행하였다.
그중 노상직의 자암서당 강학이 가장 돋보인다. 신산서원 창건 이후 김해 지역에 계승되어 오던 신산서원의 강학 정신과 한말에 그것을 되살려낸 허전의 강학 정신을 근대 망국의 위기 상황에서 구현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자암서당은 김해가 아닌 밀양에 있었지만, 그것이 신산서원 강학 정신과 그것을 되살려낸 허전의 강학 정신의 계승이 아닐 수 없다. 대도회가 아닌 산림에서 학자가 세속을 멀리한 채 조용하게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그래서 스승과 제자가 하나의 학문 공동체로서 서당마을을 이루어 강학할 수 있는 최적지로 밀양을 택한 것이었다. 이곳으로 다수의 김해 선비들이 찾아와서 학문을 익혔다. 스승과 제자가 하나의 학문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에 서당에 소속된 제자들이 유계회를 조직하고, 유계회의 계금(契金)을 조성해서 유지해 나갔다. 서당 건물을 짓는 것부터 서당을 유지하는 것까지 모든 것을 그 서당에 소속된 유계회와 그곳에서 거둬들인 계금으로 스승과 학생이 공동으로 운영하였다.
노상직은 1910년 망국 이후 한동유(韓東愈)에게 답한 편지에서 “우리들의 운명이 박복하여 고국의 역사를 지키지 못했으므로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고, 학문을 해도 학문이 될 수 없습니다. 이미 죽을 자리를 얻지 못했으니, 오히려 마땅히 우리 선왕이 교육으로 자강을 꾀한 방책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라고 한 것에서 노상직이 서당 교육에 전념했던 뜻을 읽어볼 수 있다. 현실과 자신을 단절한 채 서당 교육에 전념한 것은 유인석이 망국 이후 유자의 현실 대처 방식으로 제시한 ‘처사삼변(處變三事)’ 중 세상을 멀리 떠나 자신의 옛 것을 지킨 ‘거지수구(去之守舊)’에 해당한다. 노상직은 자암서당 일지인 『자암일록』을 기록하는 제자들에게 일지에는 서당 밖의 세상사, 특히 시국의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기록하지 말 것을 엄히 명하였다. 그리고 자암서당으로 건너오는 다리를 ‘단진교(斷塵橋)’, 자암서당으로 올라오는 입구에 있는 시내를 ‘세심간(洗心澗)’으로 명명하면서 세속과 완전히 절연된 공간에서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는 공동체를 지향하였지만, 그곳에서 길러낸 인재 다수가 파리장서에 서명하고, 많은 인사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김해 지역 유학의 발전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으로 현대에 창건된 월봉서원이 있다. 월봉서원은 이보림(李普林)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1986년 지역유림이 월봉서당 안에 명휘사(明輝祠)를 건립해서 위패를 봉안하고, 월봉서당을 월봉서원으로 고쳐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보림은 중종의 제5남 덕양군(德陽君) 이기(李岐)의 후손이다. 선대는 경기도 여주에서 살다가, 7대조 이춘흥(李春興)이 신임사화를 계기로 밀양을 거쳐 김해로 내려왔다. 비록 김해에 터 잡고 살았지만, 여전히 기호학파의 여러 집안과 혈연적으로나 학문적으로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전우(田愚)와 전우의 문인 오진영(吳震泳)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평생 담화종지(潭華宗旨), 곧 이이[석담(石潭)의 ‘담(潭)’]와 송시열[화양동(華陽洞)와 ‘화(華)’]에서 유래한 학문의 종지를 굳건히 지켰다. 학문은 이이를 종주로 하고 의리는 송시열을 종주로 해서, 두 사람과 달리하는 어떠한 주장도 사설(邪說)로 간주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특히 ‘춘추의리’에 근거한 척사위정 정신으로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전래의 의관과 상투를 고수하며 왜색으로 흐르는 현실을 극도로 비판하였다. 일제의 식민 지배가 강화되면서 모두 여기에 굴복하자, “우리가 오늘날 구차하게 살아있는 게 부끄러운 일이니, 오직 ‘수사선도(守死善道)’ 네 글자 부적을 이마에 붙여두어야 하겠다.”라고 하고는 봉산재서당(鳳山齋書堂)과 일신재서당(日新齋書堂)을 열어 원근의 선비를 모아 전통 유학을 가르쳤다. 해방 이후에는 전통 윤리를 부식하고 후진을 교육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72년 이보림이 사망하자 아들 이우섭(李雨燮)이 서당을 계속 유지하였다. 서당을 유지하던 학계 양지계(兩止契)가 존속되면서 1983년에는 그 서당과 학계를 모체로 명휘사를 세우고 월봉서원을 창건하게 되었다. 김해 월봉서원은 비록 현대에 창건되었지만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의 학문만 존재했던 김해에 기호학파의 학문을 보태 유학의 다양화를 기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