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014
한자 金海 地域 改新敎 傳來- 金海敎會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탁지일

[정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 최초의 개신교회인 김해교회의 설립과 함께 본격화된 개신교 활동.

[개설]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의 본격적인 기독교 전래는 19세기 말 김해 지역민들이 부산에 거주하던 미국 선교사를 찾아가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894년 김해 지역 첫 개신교회인 김해교회가 설립되었고, 이를 계기로 개신교회들이 곳곳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김해 지역 개신교는 일제 강점기 3·1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고, 6·25전쟁 시기 많은 피난민들이 유입되면서 양적인 성장을 하였다. 현재 김해 신도시의 본격적인 개발과 함께 240여 개의 교회 및 기관들이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들어가는 말]

김해 지역에서 본격적인 개신교의 전래는 서양 문화에 관심이 있던 김해의 지역민들과 부산에 거주하고 있던 미국북장로교 선교사인 윌리암 베어드(Willam M. Baird)[한국명 배위량, 1862~1931]와의 만남을 통해 시작되었다. 베어드는 1891년 부산에 와서 1895년까지 선교 사역을 했던 선교 초기의 대표적인 교육 선교사인 동시에 영남 지역 교회 설립의 개척자였다. 부산과 대구 지역의 선교 경험을 바탕으로 평양에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진행했으며, 오늘날의 숭실대학교를 설립해 기독교 및 민족 교육에 헌신한 인물이다.

베어드는 부산과 서북 지역에서 교육의 장소로 ‘사랑방’이라는 한국의 전통적인 생활 공간을 중시하였다. 베어드에 따르면, 사랑방은 한국의 독특한 문화였는데, 선교 초기 사랑방은 복음 전도를 위해 활용된 아주 유용한 공간이었다. 베어드는 사랑방을 찾아온 김해 지역민들과의 만남을 통해 기독교 복음을 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김해 지역에 본격적인 개신교의 전래가 시작되었고, 김해교회를 비롯한 많은 개신교 교회들이 세워졌다.

[복음의 싹을 틔우다]

베어드는 김해에서 자신을 방문한 두 사람과의 사랑방 만남에 대해, 김해 지역에 사는 두 남성이 수차례 자신을 방문했고, 「요한복음서」와 『신덕통론(信德通論)』「마태복음서」 책을 받아갔다고 기록했다.

이러한 만남은 김해 지역 최초의 교회인 김해교회의 설립으로 이어진다. 이상규는 ‘배○○’을 김해교회의 설립자인 배성두(裵聖斗)[1840~1922]로, 그리고 배성두와 함께 김해교회에서 함께 사역했던 ‘칠원 김영감’을 김종함으로 보고 있다. 배성두와 김종함이 김해교회 설립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는 “김해읍내(金海邑內)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본지인 배성두가 부산에서 복음을 득문하고 귀가전도하야 신자 10여 명이 계흥함으로 교회가 수성하니라.”라고 1898년 김해교회의 설립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반면 『김해교회백년사』에서는 베어드의 기록과 「예수교신보」의 기사를 근거로 1893년 배성두가 베어드를 접촉한 이후부터 이미 신자들이 회집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고, 김해교회의 설립 시기를 1896년이나 1897년 이전으로 추측하고 있다.

김해교회의 설립자인 배성두는 김해 동상마을[현 김해시 동상동]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배광국의 약방을 이어받아 운영하던 배성두는 서양 문화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부산에서 선교하던 베어드를 찾아갔고, 마침내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후 자신의 약방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고, 이 모임은 김해교회의 설립으로 발전하였다. 배성두는 김해 지역 기독교 전래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1911년 김해 지역에서 최초의 장로가 되었다. 당시 김해 지역 기독교는 근대 문물을 소개하는 통로인 동시에, 민족 독립 의지를 함양하는 거점이기도 했다.

[복음으로 민중을 일깨우고]

배성두와 함께 했던 사역자들의 노력으로 김해교회는 지속적으로 성장하였다. 미국북장로회 연례보고서에 기록된 부산선교지부의 보고에는 “이곳[김해]에서의 사업은 활발하다. 급속한 발전은 없지만 점진적이고 건전하게 발전하고 있다. …… 그들은 늘어나는 교인 수에 비하여 너무 작았던 옛 예배당을 팔고 보다 큰 건물을 샀는데, 그것은 매우 훌륭했으며 빚을 지지도 않았다. 김해에는 21명의 세례인과 학습인이 있으며, 이들 외에도 관심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라고 김해교회의 현황이 기록되어 있다.

미국북장로교 선교사인 심익순(沈翊舜)[Walter Everett Smith, 1874~1932]이 김해교회의 목회를 도왔다. 심익순은 1902년 11월 한국에 왔는데, 부산에서 10년 동안 복음 전도와 교회 설립을 위해 헌신했으며, 나환자들을 위한 선교 사역도 하였다. 심익순은 부산 영선현, 부산 서남편, 김해군 동편, 마산부 창원, 웅천 동남편, 칠원군 서남편을 맡아서 선교를 하였다.

한편 배성두와 심익순은 김해 지역의 교육 선교 및 민족 민중 교육에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1907년 합성학교[현 합성초등학교]의 설립을 주도하였고, 1909년 4월 10일 정식으로 인가를 받았다. 근대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을 목표로 설립된 합성학교는 초등과와 고등과를 설치해 운영했는데, 지역민들의 도움과 함께 김해교회 교인인 배성두·배순서·김성철 등에 의해 운영되었다. 1921년에는 독립운동가인 허발박석권 등을 중심으로 유지위원회가 조직되었고, 항일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1927년 고등과가 폐쇄되어 김해공립농업학교에 양도되었고, 1931년 재단법인 합성보통학교로 운영되는 등의 변화를 겪다가, 해방 이후인 1956년 합성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이처럼 선교사들은 복음전도를 위해 교회를 세우고, 의료 선교를 위해 병원을 운영했으며, 교육 선교를 위해 학교를 설립하는데 주력했다.

김해 지역 초기 교회들은 미국북장로교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설립되기 시작했으며, 1914년부터 본격화된 호주장로교회의 선교로 급격히 성장하였다. 호주장로교 한국선교회 부산선교지부[Pusanchin Mission Station]는 김해 뿐만 아니라 동래·기장·울산·언양·울릉도·양산·밀양·영산·창녕 등을 관할 지역으로 포함하고 있었다. 특히 선교지부들[부산·진주·마산·통영·거창]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은 김해 지역의 교회들은 자발적으로 예수 신앙을 받아드린 지역의 선각자들과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순회 목회 활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아갔다.

[복음이 민족독립운동으로 꽃피다]

김해교회가 설립된 이후 교회들이 지속적으로 설립된다. 경남 선교 1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경남성시화운동본부의 조사에 따르면, 1910년 일제 강점기 이전 김해 지역에 설립된 교회들은 총 8개였다. 김해 지역에서는 감천교회·김해교회·진영교회·진영감리교회·시산교회·김해내삼교회·관동교회·장유중앙교회 등을 통해서 복음의 씨앗이 널리 뿌려지기 시작하였다.

김해 지역 개신교의 대표적인 공헌은 일제 강점기 3·1독립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김해 지역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30일 김해 읍내에서 시작되었다. 김해 출신으로 서울 세브란스의전 학생 배동석과 마산 창신학교 교사 임학찬, 그리고 서울 정신여학교 학생이었던 구명순 등이 주도를 하였다. 김해 지역 만세 시위로 말미암아 배동석임학찬은 체포되어 배동석은 징역 1년, 임학찬은 징역 7월의 형을 각각 선고 받았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김해 지역의 개신교는 지속적으로 성장하였다. 1922년 임리교회가 설립되었고, 김해교회는 건물을 신축했으며, 1923년 도도교회가 설립되었다. 1926년까지 김해 지역의 교회는 13개였고, 개신교인은 2천여 명에 이르렀는데, 그 중에 김해교회의 교인들이 500여 명에 이르렀다. 1925년 김해교회내동과 봉곡에 교회를 설립했는데, 각각 80여 명과 30여 명의 새로운 교인들이 교회를 찾았다. 1938년에는 김해 지역 개신교회가 장로교회만 헤아려도 25개에 이르렀다.

김해 지역의 사회 운동에도 개신교인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다. 1927년 설립된 민족 운동 단체인 신간회 김해지부에도 개신교인들이 참여하였고, 1930년 김해 지역 항일 학생 운동에도 개신교인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있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경상남도 지역의 개신교계는 일제의 신사 참배와 전시 협력의 강요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경남 지역 장로교단의 전시 협력 활동은 경남노회의 신사 참배 결의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후에 결성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 경남노회지맹과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경남교구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김해를 포함해 경상남도 지역을 관할하던 호주선교부는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의 신사 참배 결의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함으로써 신사 참배를 받아드린 경남노회와 갈등하였다.

1943년 5월 5일에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 설립되었고, 그 후 각 지역별로 교구회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경남교구회는 부산교구·진주교구·마산교구·거창교구 등으로 나뉘어졌다. 경남교구회의 주요 실천 사항은 대동아 전쟁 협력, 교회의 전시 체제화, 징병제 강조, 일본 문화의 적극적 수용 등을 포함하였다. 경남 지역 개신교회는 경남교구회를 통해 신사 참배와 황국 신민 교육을 진행했고, 소위 대동아 전쟁의 목적 완수를 위한 국방 헌금을 납부하였다. 또한 경남교구회는 시국 강연과 징병제 강연회 등을 주도하는 등, 친일 전시 협력을 수행했으며, 이러한 친일 협력의 여파로 인해 해방 이후 경남 지역 개신교회는 교단 분열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나오는 말]

해방 후 발발한 6·25전쟁은 부산·경상남도 지역 개신교 성장의 전환점이 되었다. 전쟁의 시작과 함께 전국에서 유입된 개신교 피난민들의 수용을 통해 급격한 양적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피난지 부산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김해 지역도 이러한 기독교 성장의 영향을 받았다. 비록 김해 지역이 낙동강 방어선 서부에 근접해 있었지만 많은 피난민들이 찾아와 피난 생활을 했다.

오늘 날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 지역은 종교적으로 불교의 영향력이 가장 강한 지역이며, 이곳의 개신교 교세는 제주도와 함께 전국에서 가장 낮은 비율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양적인 규모로만 평가할 수 없는, 전국적으로 가장 모범적인 초교파 교회 연합 운동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는 김해 지역 개신교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역 사회의 요청에 연합적으로 신속히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00년 이후 김해 신도시 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김해 지역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양적으로 빠르게 성장해오고 있다. 현재는 남해고속도로를 중심으로 김해 도심 지역과 장유 지역의 두 생활권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각 교회 연합의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김해시기독교연합회에는 현재 240개 교회들[고신 49, 통합 43, 합동 43, 기타 105]과 12개의 기독교기관들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활동 중에 있다.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기독교를 수용한 김해 지역 초기 기독교인들은 일제 강점기 항일 독립운동 및 민족 교육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왔다.

현재 국내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들 중 하나로, 또한 대표적인 다문화 지역으로 분류되는 김해시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개신교회들과 개신교인들은 오늘도 사회적 순기능의 역사를 이어 나아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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