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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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海 出身- -學者- 金海-博物館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언어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목지선 |
[정의]
경상남도 김해 출신 한글학자 이윤재, 허웅의 생애와 김해 한글박물관.
[개설]
경상남도 김해시 외동에 있는 김해한글박물관은 ‘박물관 도시, 김해’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건립되어 2021년 11월 9일 개관한 한글 박물관이다. 김해한글박물관은 서울에 있는 국립한글박물관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개관한 한글 박물관이자 국내 최초의 공립 한글 박물관이다. 1443년 한글 창제 이후의 한글로 된 문화와 한글 관련 역사를 재조명하는 공간이며, 우리 겨레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알리는 역할과 함께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한글 문화 복합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또한 한글의 가치와 자부심을 알리는 동시에 한글을 세계화함으로써 창조적, 문화적 국가 브랜드 창출에 기여하며 한글을 콘텐츠로 한 문화 산업 및 문화 관광 확대 효과를 도모하고 있다. 특히 평생 한글 사랑과 나라 사랑을 몸소 실천해 오신 김해 출신 한글학자 한뫼 이윤재(李允宰) 선생과 눈뫼 허웅(許雄) 선생의 업적과 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여러 자료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그 의의와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김해한글박물관]
김해한글박물관은 한뫼 이윤재 선생과 눈뫼 허웅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한글 문화 유산을 보존하고 전시하기 위해 건립된 박물관이다. 지하 1층 지상 2층, 전체 면적 600㎡ 규모로 건립되었으며 1층은 기획 전시실, 2층은 영상실[특별 전시실], 보이는 수장고, 제1 전시실, 제2 전시실 및 교실 체험 공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 전시실과 제2 전시실에는 한뫼 이윤재 선생과 눈뫼 허웅 선생의 생애, 업적과 관련된 유물이나 서적 등을 언제든지 볼 수 있도록 상시 전시하고 있으며, 허웅 선생의 집필 공간을 재현한 체험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그 외에도 유물이 어떻게 보관되어 있는지 관광객들이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보이는 수장고’와 AR[증강 현실] 화면을 이동시켜 화면을 누르면 책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AR 슬라이드 등이 설치되어 있고,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이후 왕실에서 사용된 한글 문화유산 등도 전시되어 있다. 또한 기획 전시실에는 김해한글박물관에서는 1점의 보물과 7,000여 점의 유물을 기증 받아 전시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조선말큰사전』, 『문예독본(文藝讀本)』, 한글로 작성한 최초의 공문서인 「선조국문유서(宣祖國文諭書)」[보물]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외에도 국립한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원본 특별전,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상 전시 등의 한시적 특별 행사도 펼쳐 김해시민들과 김해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해한글박물관은 단순한 전시를 위한 공간의 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다. 교실 체험 공간을 마련하여 1950~1980년대의 책걸상, 칠판 등으로 옛 교실을 재현해 향수를 느낄 수 있게 하는 한편, 연도별 국어 시험을 보고 성적표를 받을 수도 있다. 디지털 기기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관람객들의 흥미를 유발함으로써 전시 자료를 읽고 체험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옥상의 휴게 공간에는 트릭 아트(trick art)가 설치되어 있어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이 재미있는 사진을 다양하게 찍으면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하였다. 기념일에는 옥상에서 특별 공연이나 다양한 체험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김해한글박물관은 한글 관련 행사 외에 지역민들과 소통하고 문화를 교류하기 위해 소꿉 전시회나 참여형 활동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작은 도서관 등 다양한 행사를 펼치기도 한다. 또한 김해한글박물관은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추어 다양한 시도를 하는데 박물관 최초로 메타버스(metaverse) 세계를 박물관 홈페이지에 도입하여 직원들을 순 한글 이름을 가진 아바타로 구현하여 기존의 정형화된 조직 관계에서 탈피하여 자유롭게 소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김해한글박물관은 자유롭게 관람이 가능하며, 전시 해설이 필요할 경우 미리 신청하면 들을 수 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관하며[입장은 오후 5시 30분까지] 매주 월요일은 휴관일이다. 휴일이 월요일과 겹칠 경우 월요일은 개관하며 다음 날인 화요일에 휴관한다.
[한뫼 이윤재 선생의 발자취]
이윤재 선생은 1888년 12월 25일 김해도호부 우부면 답곡리[현 경상남도 김해시 대성동]에서 아버지 문헌공 이용준과 어머니 이임이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호는 한뫼, 한메 등으로도 불리었으나 대부분 환산(桓山)이라 하였다. 결혼 후 아내와 딸 셋, 아들 둘을 두었다.
1894년부터 향리의 한문 의숙에 들어가 한학을 10년 동안 공부했는데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인근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1913년 마산 창신학교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다. 1919년 평안북도 영변 숭덕학교 교원으로 재직하였으며, 3·1운동 당시 지역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3·1운동 직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3·1운동 주도 혐의]으로 평양 감옥에서 3년 징역에 1년 6개월 동안 수감 생활을 하였다. 1921년 출옥 후 중국으로 건너가 신채호 선생의 도움으로 3년간 북경대학 사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24년 한국으로 돌아와 정주 오산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다. 1925년 안창호가 조직한 민족 운동 단체인 흥사단에 가입하였다. 서울로 올라와 4월부터 협성학교 교원이 되어 국어 독본과 국사를 가르쳤다.
1928년 민족정신 보전과 계승을 위한 국학 전문 잡지 『한빛』을 창간하고 편집, 발행하였다. 1929년 조선어연구회,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조직 및 집행 위원 실무을 맡았으며, 사전 편찬을 위해 중국 상해에 망명 중인 김두봉을 만났다. 1930년 동덕여자고등학교 교원을 역임하고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위원이 되었다. 1931년 연희전문학교 교원을 역임하고 매년 지방을 순회하며 한글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1932년 『한글』 창간 및 편집, 발행을 담당하였다. 1934년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원을 역임하고 일본인 역사가 모임인 청구학보에 대항하여 ‘진단학회’ 설립에 참여하였다. 1935년 감리교신학교 교원을 역임하고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 사정 위원이 되었다. 1936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의 편찬 전임 집필 위원이 되었다.
1937년~1941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투옥[치안유지법 위반] 후 무죄 판결로 출옥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최현배, 이희승(李熙昇) 등과 검거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 구금되어 모진 고문과 폭력 끝에 1943년 12월 8일 새벽 5시 55세의 나이로 함흥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유택은 서울특별시 성동구 광나루 근처 방앗골 산28번지에 마련하였다. 추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1묘역 199호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91년 김해도서관 광장에 이윤재 선생의 흉상과 어록비가 세워졌다. 2005년 김해문화원 나비공원 내 이윤재 선생 기념 조형물이 설치되었다. 2021년 김해도서관 2층에 이윤재 기념관을 개관하였으며, 나비공원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한뫼 이윤재 선생과 한글]
우리말을 바르게 사용하기 위한 국어학자들의 투쟁과 희생, 그리고 노력이 고스란히 담긴 값진 유산,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 중 하나가 환산 이윤재 선생일 것이다. 이윤재 선생은 국어와 역사 연구, 한글 통일과 보급을 위해 평생 자신을 희생한 독립운동가이자 학자였다. 특히 환산은 일제 강점기, 그 어둡고 힘든 시기에 40여 종 이상의 신문·잡지에 글을 발표했으며, 자신이 직접 글을 발표하지 않더라도 한글 맞춤법을 보급하고자 시간을 쪼개가며 각종 출판물의 교열을 맡아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해군 합성학교[현 김해합성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는 야학 교사로도 이름을 떨쳤는데, 동네에 설치된 농무회의 명예 교사로 자원하여 김해 지역 야학 운동을 이끌어 나간 중심인물인 동시에 근대 교육을 보급하고자 앞장서던 활동가였다. 당시의 야학은 단순히 우리말 교육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우리말을 가르치고 지식을 배양하고자 하는 목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일상사의 변화와 더불어 민중 의식을 고취시키려는 중요한 기제 중 하나였다. 그리고 환산은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매년 강연회를 펼치는 등 한글학자로서의 소임을 다하고자 잠시도 쉬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이윤재 선생은 천성이 순진 결백하고 다정다감한 분으로 일생 동안 한글 운동을 천직으로 삼아 온몸을 바쳐 헌신해 오셨다고 한다. 항상 한복 차림에 두루마기는 검정색 물을 들인 무명옷이었으며, 신 역시 검정색 고무신을 즐겨 신으셨다고 한다. 백발의 노모와 다섯 아이들을 키우며 생활의 곤란을 해결하고자 방을 놓아 하숙생까지 함께 기거하던 좁은 집에는 선생이 한글을 연구하고, 잡지를 편집하고 간행할 여유 공간이라곤 없었지만 선생은 그곳에서 한글 연구와 집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선생의 처조카이자 교수인 정인홍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선생의 집에는 서재라고는 꿈도 꿀 수 없었으며, 선생의 작은 방에 책꽂이는 있었으나 책상은 없었기 때문에 늘 엎드린 채 집필을 하곤 했는데, 『한글』 교정을 보고 있는 선생의 등에 아이들이 올라타며 놀고 있는 모습이 생생하다고 하였다.
그는 겉으로 드러내기보다는 묵묵하고 담담한 사람이었다. 자녀 교육이나 사람들에 대한 가르침에 있어 말을 늘어놓아 타이르지 않았다고 한다. 한두 마디 훈계가 전부였으며, 거듭되는 옥고에 심신의 피로가 쌓여 건강이 쇠약해졌음에도 사전 편찬뿐만 아니라 잡지의 편집, 대중 계몽을 위한 강연과 강습, 다양한 출판사 인쇄소의 교정 업무 등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해내고 그것을 자신이 응당 해야 할 일로 생각했다고 전한다. 환경도 상황도 탓하지 않고 묵묵히, 그리고 담담하게 자신의 일을 해 나가는 선생이었지만 단 하나 참지 못하는 것은 일제와 협력하거나 우리말을 지키지 않으려 하는 언행이었다. 남에 대한 욕을 절대 하지 않는 선생이었지만 일제에 전향하거나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대해 반대하는 자가 있으면 가차 없는 비난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심신의 피로가 가중된 가운데 또 다시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되어 고문을 받은 선생은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한 기념일인 12월 3일을 감방에서 보낸 5일 뒤 12월 8일 혹독한 고문과 추위, 영양실조가 겹쳐 피투성이로 두 주먹을 부르쥔 채 영하의 감방에서 눈을 감았다.
이런 선생의 삶과 의지는 우리말을 지키려는 여러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우리말 사전을 집필하는 밑거름 역할을 해 주었다. 『표준 조선말 사전』 서문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이 사전을 지은 환산은 착한 사람이요, 어학자요, 애국자라, 나라를 사랑하고 동포를 사랑하기를 자기 한 몸 자기 한 집안보다 더하던 이로서 이 아름다운 우리의 말이, 좋은 우리의 글이 아주 명멸의 고비에 닥쳤을 무렵에 이를 슬퍼하고 이를 분히 여기어 어찌하면 이를 건져 내어 바로잡고 널리 펼칠까 하여 교단에서 강당에서 입으로 가르치고 부르짖으며 잡지와 신문에 글을 실어서 애를 태우고 헤매던 것이 오직 그의 하나일 일이었읍니다. 이로 말미암아 환산이 함흥 감옥에서 세상을 버리게 되었읍니다. 그가 오늘에 있었던들 지금 우리 새 나라를 건설하는 이 때에 있어 우리 국가 사회에 이바지하여 그림이 그 어찌 이 작은 『표준 한글 사전』[재판부터 책명이 변경됨] 한 책에 그칠 바이겠읍니까? [중략] 이 책을 보는 이들이여! 말을 바르고 옳게 하고 글을 바르고 옳게 써서 우리의 정신이 다 하나가 되어 우리 나라를 튼튼하게 하여 우리 나라의 빛이 널리 퍼지면 우리는 다같이 그 때에 우리의 할 바를 한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며, 환산도 하늘에서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 단군기원 4283년 2월 21일 동운 이중화 씀”
[눈뫼 허웅 선생의 발자취]
눈뫼 허웅 선생은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언어학자, 국어학자, 한글학자로서 국어학 분야를 언어 과학의 단계로 발전시키는 데 앞장섰으며, 국어 운동가로서 국어를 지키고 가꾸는 실천 운동을 전개하였다.
본관은 양천(陽川). 아호는 눈뫼. 1918년 7월 26일 경상남도 김해시 동상동에서 아버지 허수, 어머니 윤영순의 5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백금석과 결혼하여 2남[허황·허원욱] 4녀[허경순·허경미·허혜숙·허혜련]를 두었으나 첫째와 둘째 딸은 어려서 사망하였다.
1934년 2월~1935년 3월 동래보통학교를 병으로 휴학한 뒤 3학년에 복학하여 국어를 공부하기로 결심하였다. 1939년 6월 연희전문학교 문과 중퇴 후 국어를 독학으로 공부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1940년~1942년 폐침윤(肺浸潤)으로 인해 요양 생활을 하면서 15세기 국어 문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아 고향인 김해에서 한글 강습을 열어 여러 차례 교사 노릇을 하였다. 1945년 9월~1984년 2월 광신상업고등학교 및 한성고등학교 교사. 부산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 서울대학교에서 국어 및 언어 관련 강의 및 연구를 하였다. 1968년 서울대학교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4년 2월 퇴직 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연세대학교 석좌교수, 중국 상하이외국어대학 명예교수로서 국어학 및 언어학 연구에 힘썼다. 그 외 한글학회 이사장, 국어 조사연구 위원회 위원장,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이사, 외솔회 재단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2004년 1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국어 음운학의 공시적·통시적 체계를 최초로 세운 『국어음운론』[1958], 최초의 언어학 개론서인 『언어학개론』[1963], 15세기 국어문법을 기술한 『우리옛말본』[1975], 『국어학-우리말의 오늘, 어제』[1983], 『20세기 우리말의 통어론』[1999] 등 수십 권의 저서와 수많은 논문 및 논설을 남겼다. 한글 전용 운동에 앞장서 초등학교 한자 교육 반대, 한자 혼용 반대, 한글날 공휴일 제외 반대, 「한글 전용법」 폐기 반대, 한글날 국경일 제정, 영어 공용어 반대, 「한자 교육 진흥법」 등을 반대하였다. 1973년 외솔상과 국민훈장 모란장, 1986년 성곡학술문화상, 1990년 세종문화상, 1993년 주시경학술상, 1998년 세종성왕 대상 등을 수상하였다. 국어학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2004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눈뫼 허웅 선생과 한글]
눈뫼 허웅 선생은 한힌샘 주시경(周時經) 선생과 외솔 최현배(崔鉉培) 선생의 대를 이어 가장 존경받는 국어학자요 언어학자이다. 허웅 선생의 집 2층 서재는 낡고 검소한 소파가 놓여 있는 좁은 마루를 사이에 두고 2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한쪽 방에는 주로 언어학과 국어학과 관련된 책들이 천장까지 즐비하고, 다른 한쪽 방에는 전공과 관련 있는 역사 서적과 고전들이 그득했다고 한다. 거기에 역시 낡고 검소한 책상이 하나. 그 외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그런 서재에서 선생은 한결 같은 국어 사랑과 나라 사랑을 실천해 온 것이다.
허웅 선생을 인터뷰한 신문 기사[「한글학자 허웅 박사의 서재」]를 보면 “훤칠한 키에, 안경 너머로 깊숙이 패인 눈매가 언뜻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지만, 경상도의 억양이 약간 섞인 말씨가 오히려 구수하고 소박한 인품을 느끼게 하는 허웅 선생의 구수하면서도 개결(介潔)하고 끼끗한 성품이 검소한 서재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져 방문객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고 하였다. 그리고 서재가 아니라 ‘책방’이란 말이 마음에 더 흡족하다는 선생의 말도 덧붙어 있었다.
국어학계에선 “주시경 선생이 국어학의 주춧돌을 놓았고 최현배 선생이 집을 지었다면 허웅 선생은 그 집을 보수했다”는 평가를 내릴 정도로 허웅 선생이 우리 국어학계에 미친 영향은 실로 크고 가치 있다고 할 수 있다. 허웅 선생은 우연히 접한 최현배 선생의 『중등조선말본』과 『우리말본』에 큰 감명을 느끼고, 이를 계기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이 국어 연구임을 결심한 이래 한평생 우리말과 우리글을 갈고 닦는 데 헌신해 왔다. 최현배 선생에 대한 허웅 선생의 애정과 존경은 『우리 옛말본』에도 잘 드러나 있다.
“나에게 있어 『우리말본』의 체계는, 내 어릴 적부터 내 살과 피와 뼈에 스며들어 있는, 내 학문의 알맹이를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우리 옛말본』을 쓰기를 한평생의 소원으로 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그러므로 『우리 옛말본』의 체계가 『우리말본』의 그것을 뼈다귀로 하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책의 제목을 『우리 옛말본』이라 한 것도 오로지 선생님의 학은을 잊지 않겠다는 내 조그마한 충정에서다.”
또한 허웅 선생의 국어 연구는 민족 문화를 잇고, 가꾸는 데서 시작하였다. 한 나라의 말은 그 나라의 정신이며, 그 겨레의 문화 창조의 원동력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말은 민족정신과 문화의 뿌리라는 믿음을 일찍부터 마음에 품고 있었다. 특히 30여 년간 한글학회를 이끌어 오면서 우리 민족정신의 요체인 한글에 대한 사랑과 보급에 힘써 왔다. 또한 평소 “민족 자주정신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세계화는 문화적인 식민화를 초래할 뿐”이라는 지론을 가졌던 선생은 한글 전용론을 펴고, 한글날 공휴일 폐지 반대 운동을 펼치는 등 한글이 점점 푸대접을 받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에 힘을 쏟았다.
허웅 선생의 삶을 지켜본 사람들은, 선생이 국어학 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국어학자이자, 우리 민족 문화와 정신을 꿋꿋하게 지켜온 국어 운동의 실천가였으므로, 그의 학문 또한 ‘연구’와 ‘실천’ 중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이 둘의 조화를 추구하였다고 입을 모은다. 국어를 객관적인 학문의 대상으로만 보고 이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데만 급급해 국어 운동의 가치를 무시하는 학문 태도, 학문적인 고민과 바탕 없이 맹목적으로만 국어 운동에 매진하는 태도 모두 허웅 선생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학문의 목표가 단순히 학문을 위한 학문에 그쳐서는 안 되며, 국민들의 올바른 언어생활을 위해 기여해야 하며, 학문이 이를 위해 이바지할 수 없다면 그 가치는 반 이하로 떨어질 것이라 강조하였다. 즉 과학적 방법으로 국어의 본질을 규명하는 연구도 중요하지만, 국어에 깃든 민족 문화의 뿌리를 밝히면서 국어를 발전시키고 보전시키려는 의지의 실천도 이에 못지않게 가치 있는 일이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허웅 선생 학문의 바탕이 되었으며, 평생을 일관되게 지닌 학문적 태도였다. 이런 태도를 바탕으로 선생의 학문은 국어 연구를 언어 과학으로 승화시켰으며, 국어를 지키고 가꾸는 실천 운동을 전개하였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우선 허웅 선생의 가장 큰 학문적 업적 중 연구의 측면을 꼽으라면 첫 번째는 국어학 연구의 이론의 토대라 할 수 있는 언어학 이론을 수립한 것이다. 선생은 외래 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이를 독창적인 국어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두 번째는 국어 자료를 바탕으로 국어의 참모습을 밝힌 것인데, 15세기 우리말 체계를 세우고 이 체계에 따라 옛 우리말 문법 연구를 집대성함으로써 국어의 역사를 추적하는 한편, 20세기 국어 연구를 아울렀다.
다음으로 허웅 선생의 국어 운동의 측면을 살펴보자면, 선생은 국민의 글자 생활은 한글만으로 해야 하며, 언어생활은 쉽고, 바르고, 고운 말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기본으로 갖고 있었다. 이해하기 어렵거나 불필요한 한자말과 외래말을 무분별하게 쓰지 않고, 쉬운 한자말이나 토박이말로 고쳐 쓰는 것이야말로 국어 순화의 올바른 방향이라고 믿었다. 또 선생은 ‘한글은 우리 겨레와 민중을 위한 글자로 태어난 것이다’라는 생각을 주창했는데 여기에는 국민들이 우리말과 글의 가치를 높이 받들고, 국어에 대한 높은 자긍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뿐만 아니라 한글만 쓰면 모든 국민들이 문화와 정보를 누릴 수 있게 되지만, 한글과 어려운 한자를 섞어서 문자 생활을 하면 일정한 교육을 받은 지식층만이 문화와 정보를 누리게 된다는 점을 경계한 민주주의 정신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허웅 선생은 학문을 연구하는 방법적인 측면에서도 특징을 가지는데, 앞선 연구를 계승하여 이를 바탕으로 하는 동시에 독창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즉 학문은 앞선 연구의 방법론을 계승하여 발전시키되,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인 관점에 서서 이를 독창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본 것이다. 학문적인 성과란 선행 연구자들이 그 연구의 기틀이 될 만한 이론적 밑바탕이나 근거를 마련해 주어야 가능한 것이지,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항상 선행 연구의 전통과 성과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수정하고 보완함으로써 보다 공고해지고, 발전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허웅 선생은 평소 이와 같은 학문 연구 방법과 관련하여 『논어(論語)』의 「위정」편에 나오는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卽罔 思而不學卽殆)”를 자주 인용하였다고 한다. 남의 이론만을 열심히 공부하고, 자기의 독창적인 연구를 하지 않으면 학문이 어두워지고, 반대로 남의 이론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의 독단적 이론만 펼치면 학문이 위태로워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앞서 연구자들의 성과도 수용하고 이를 바탕으로 독창적 이론도 세워 가는 것이 학문을 닦는 사람들이 가야 할 바른 길이라고 하였다.
허웅 선생은 외국에서 들어온 언어 이론에 대해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이를 독창적인 국어 이론으로 발전시키는 데도 앞장섰다. 선생은 주시경 선생이나 최현배 선생 등 선각자들의 고귀한 정신적 가치를 이어받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할 정도로 정통적 학문에 대한 계승 의지가 뚜렷한 사람이었다. 주시경 선생 이래 잘 가꾸어진 수준 높은 국어학의 줄기가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찮게 여기고, 일본 학자들이 남겨 놓은 업적만을 중시하고 이를 따르는 사람도 있고, 서양 이론을 비판 없이 그대로 국어에 적용하는 사람도 있음을 지적하고 이를 식민지적 학문 풍토라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학문의 편협함에 빠지지는 않았다. 선생은 단순히 정통성의 계승에만 그치지 않고 스스로 독창적인 이론 체계를 수립하여,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했던 학문적인 문제들을 풀어내려고 하였다. 선생의 학문 방법론은 국내외 할 것 없이 여러 이론과 사상에 뿌리를 두었으며 현대 언어학 이론에서도 필요한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유럽의 기능-구조주의 언어 이론, 미국의 기술-구조주의 언어 이론, 변형생성문법 이론 등을 두루 참조하여 선생의 이론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선생은 국어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국어 자료의 정확한 기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어떤 주어진 이론의 틀에 끼워 맞추어 자료를 해석하는 것을 지양하고, 실증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국어의 구조를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방법을 통해 더욱 깊이 있는 학문적 업적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언어 이론을 넘어 국어의 현상 기술에 이르기까지 깊이 있게 다루고, 음성학에서 통어론(統語論)까지 폭넓게 아우르며, 응용 분야인 국어 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연구의 폭을 넓혔다.
그리고 선생은 수많은 후학들을 키워내어 그들 또한 국어 연구에, 국어 운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몸소 길을 보여 주었다. 제자들의 글을 보면 선생은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하였으며, 제자들의 공부는 물론이고, 미래 진로에 대해서도 같이 고민해 주고, 건강에 대한 당부도 하는 등 매우 인간미 넘치는 스승이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학자에게 학문은 ’삶 자체‘이다. 학문은 명예나 재산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을 할 수 있는 연구의 범위를 정해 그림을 그려놓고, 또 순서를 정해서 차례대로 완성해 나가야 한다. 자신의 업적을 남에게 알리기 위해 시간을 소모하지 말 것이며, 남을 의식하지 말고 묵묵히 끈기 있게 일하라’라는 선생의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학자로서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선생의 일과는 삼선동 집에서 빠른 걸음으로 학교까지 30분 정도 걸어서 오는데 강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연구실에서 연구에 몰두하다가 12시 조금 넘으면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와 연구를 이어나갔다고 한다. 선생을 떠올리면 연구실과 집 벽면을 가득 채웠던, 잉크로 손수 쓴 연구 카드가 떠오른다는 제자의 회고에서 허웅 선생의 연구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도 알 수 있다. 또한 선생은 제자들에게 언어학이 일문학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인 학문이므로 세계의 평화와 인류 행복의 기본 목표가 되어야 하며, 그것은 겨레와 나라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이 말 안에서 우리는 선생의 학자로서의 포부와 남다른 나라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서재에서 고희(古稀)를 맞은 허웅 선생을 인터뷰한 기자는 ‘그다지 생색도 나지 않고, 남이 크게 알아주지도 않는, 우리말과 글을 갈고 닦는 일에 평생을 오로지 한다는 것은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 좀더 소중히 대접받는 그래서 좀 더 번듯하고 호사스런 서재도 장만하는 그런 세상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다’로 기사를 마무리하였다. 허웅 선생은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으니 번듯한 서재를 장만해 드릴 수는 없으나 선생이 나라와 겨레를 위해, 그리고 우리말을 위해 기울인 노력들이 빛을 잃지 않도록 그가 남긴 크고도 섬세한 열매들을 간직하고, 되새기고, 갈고 닦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