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715
한자 李允宰
영어공식명칭 Lee Yoonjae
이칭/별칭 환산(桓山),한뫼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종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8년 12월 24일연표보기 - 이윤재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08년 - 이윤재 김해공립보통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21년~1924년 3월 - 이윤재 베이징대학 사학과 수학
활동 시기/일시 1924년 9월 - 이윤재 오산학교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이윤재 계명구락부 조선어사전편찬위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이윤재 『한빛』 창간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이윤재 조선어연구회·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집행위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30년 - 이윤재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31년 - 이윤재 조선어학회 상임감사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31년 - 이윤재 『문예독본』 간행
활동 시기/일시 1934년 7월 - 이윤재 진단학회 창립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2년 10월 - 이윤재 체포
몰년 시기/일시 1943년 12월 8일연표보기 - 이윤재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이윤재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1년 - 환산 이윤재 선생 어록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2021년 11월 9일 - 김해한글박물관 개관
출생지 경상남도 김해시 대성동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김해공립보통학교 - 경상남도 김해시 호계로500번길 15-15[동상동 534]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베이징대학 - 중국 베이징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23-1
성격 학자|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집행위원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

[가계]

이윤재(李允宰)[1888~1943]는 1888년 12월 24일 경상남도 김해군 우부면 답곡리[현 경상남도 김해시 대성동]에서 태어났다. 호는 환산(桓山)·한뫼이다. 아버지는 이용준(李容俊)이고, 어머니는 이임이(李任伊)이다. 부인은 정달성(鄭達成)이며,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이윤재는 6살 때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는데, 신동이란 소문이 있었다. 늦은 나이에 김해공립보통학교[현 김해동광초등학교]에 입학하여 20세[1908년]에 졸업하고, 김해의 함영학교. 합성학교[현 김해합성초등학교], 마산의 창신학교[현 창신고등학교], 의신여학교 등에서 교원 생활을 하였다. 조선어 시간에는 학생들에게 일본 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고, 국사 시간에는 정몽주의 「단심가」와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가르치며 외우도록 하였다. 평안북도 영변의 숭덕학교 교원으로 재직하던 1919년에는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1년 중국에 건너가 1924년 3월까지 베이징대학 사학과에서 수학하였다. 유학 이후 1924년 9월부터 평안도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근무하였는데, 한글의 역사를 교육하였다는 이유로 해직당하였다. 오산학교 해직 이후 협성학교, 경신보통고등학교, 배재학교,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 등의 교원을 지냈다.

1927년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의 조선어사전편찬위원이 되었고, 『한빛』을 창간하였다. 1929년 조선어연구회·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이 되었다.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1월 조선어학회로 개편되었는데, 이때 상임감사로 선출되었다. 1931년 연희전문학교에서 조선어를 강의하며 『문예독본』을 간행하였다. 또, 1931년부터 4년간 전국을 순회하며 하기한글강습회에서 강연하였다. 1932년에는 조선어학회 기관지인 『한글』의 편집 및 발행 책임을 맡았고, 1934년 7월에는 역사학자 및 한글학자들과 함께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창립하였다.

1937년 6월 흥사단 계열 조직인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와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이상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42년 10월에 다시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체포 후 기소되어 이극로·최현배·이희승 등과 함께 함흥형무소 미결감에 수감되었으며, 1943년 12월 8일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이윤재가 처음으로 쓴 글은 1911년 12월 『예수교회보』에 실은 「구주탄생」이다. 창가 형식의 작품으로, 예수 탄생 이야기를 누구나 알기 쉽도록 구성하였다. 1914년에는 창신학교 교가를 작사하였다. 1931년에는 문학 교과서인 『문예독본』[진광사]을, 1933년에는 『학생계몽 대용 한글공부』[동아일보사]를, 1946년에는 박지원의 『도강록(渡江錄)』[대성출판사]과 『성웅 이순신』[통문관]을 발간하였다. 1948년에는 75,000여 어휘의 뜻을 풀이한 『표준한글사전』[유고]이 출판되었다. 일상에서 쓰이는 순우리말과 한자 말을 비롯하여 외래어와 사투리까지 뜻을 풀이하여 실었다.

이윤재는 주시경의 문하생이 아니면서도 주시경의 학문과 사상을 가장 충실하게 계승·발전시킨 어문학자이자 역사학자로 평가받는다. 어문·역사·민속·연극 및 희곡에 이르기까지 여러 권의 저서와 150여 편의 논문·논설·수상 등을 남겨, 문사(文史) 민족주의를 창도한 사회사상가라는 평을 받는다.

[묘소]

이윤재는 처음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방이리[현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산28번지에 가매장되었다. 이후 1946년 4월 6일에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께 투옥되었던 동지들이 새로운 묘를 만들어 이장하였다. 다시 1973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으로 이장되었으며, 2013년 9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이윤재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1991년에는 김해도서관 내에 ‘환산 이윤재 선생 어록비’가 건립되었는데, 2002년에 국가보훈처 현충 시설로 지정되었다. 2021년에는 김해 출신 한글학자 이윤재허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경상남도 김해시 분성로김해한글박물관이 개관하였다. 박물관 뒤 나비공원에는 ‘한뫼 이윤재 선생 기념비’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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