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 시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286
한자 新石器 時代
영어공식명칭 Neolithic Ag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선사/석기
집필자 임학종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에서 토기와 간석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던 시기.

[개설]

지구의 기후는 구석기시대 마지막, 지금부터 1만여 년 전부터 따뜻해져서 현재와 비슷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후빙기[Holocene]라고 부른다.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구석기 시대와 달리 사람들이 움집을 짓고 모여 살게 되었다. 또한 흙을 빚어 토기를 만들었고, 깬돌 석기 대신 간석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하였던 시기였다. 세계의 지역마다 그 시작 시기가 다르나, 보통 1만 년 전부터 기원전 1천 년 경까지 계속된 이 시기를 신석기 시대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신석기 문화는 토기의 형태를 기준으로 보통 동북 지역, 서북 지역, 중서부 지역, 남해안 지역, 동해 중부 지역의 5개 문화권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김해의 신석기문화는 남해안 지역의 문화권에 든다

김해 지역의 신석기 시대 유적은 대부분 조개더미 유적이다. 낙동강과 남해가 만나는 곳에 형성된 옛 김해만 가장자리에 분포하고 있다. 신석기시대 유적은 대부분 강가나 바닷가, 낮은 구릉에 입지하는 것이 보통인데, 김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해수면 변동을 고려하면 김해의 신석기 시대 유적은 하나 같이 모두 바닷가에 입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김해의 신석기 시대 유적 중 산 꼭대기나 높은 구릉에서 확인된 것은 없다. 조개더미는 집터나 마을에서 먹고 버린 여러 가지 물품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거기에는 당연히 집터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구가 나오기 마련이다. 특히 김해의 신석기 시대 유적 입지는 해수면 변동과 밀접하게 연동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해수면 변동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변동의 원인으로는 여러가지가 있으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기온 변화에 따라 대륙 빙하로 인한 물의 증감이었다. 따라서 바닷물이 물러났을 때 만들어졌던 유적은 바닷속에 있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예전에는 김해의 유적이었으나 행정 구역 개편으로 부산광역시에 편입된 조개더미도 많은데 수가리 유적, 가락 유적, 죽림 유적, 북정 유적 등이 그 예이다.

[김해의 신석기 시대 유적]

김해의 신석기 시대 문화도 남해안 신석기 문화의 큰 범주에 든다. 유적으로는 농소리 조개더미, 화목동 유적, 예안리 유적, 장유 율하 유적, 시산리 유적 등이 알려져 있다. 중요한 몇 유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농소리 조개더미 유적[農所里貝塚遺蹟] : 주촌면 농소리 132-8번지 일대이다. 1964년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하였다. 현재는 파괴되어 일부만 남아 있다. 4개 층위 중 아래의 2개 층에서만 빗살무늬토기, 숫돌 조각, 공이, 골각기 등이 출토되었으며, 유물의 출토량은 매우 빈약하다. 퇴화한 빗살무늬 토기로 보아 조개더미의 중심 시기는 신석기시대 말기인 기원전 2,000년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2. 예안리 유적(禮安里 遺蹟) : 대동면 예안리 장시마을 일대에 위치하는 삼국 시대 고분군인데[사적 김해 예안리 고분군], 1976년부터 1980년까지 그리고 2019년의 발굴 조사에서 목곽묘, 석곽묘, 석실묘, 옹관묘 등 200여 기의 삼국 시대 무덤이 조사되었다. 발굴 지역 중 북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서 두 기의 원형 돌무더기[圓形集石遺構]가 조사되었다. 함께 출토된 신석기 시대의 후기에 해당하는 빗살무늬 토기를 근거로 이 유구를 신석기 시대의 것으로 보고 있다. 야외노지 혹은 무덤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3. 화목동 유적(花木洞 遺蹟) : 화목동 1056·1057번지 일원이다. 칠산(七山)의 가장 북동 쪽 해발 51.8m 낮은 봉우리의 남동쪽에 해당한다. 최하층의 신석기 시대 문화층에서 신석기 시대 말기의 겹아가리 토기[二重口緣土器]와 구덩이[竪穴] 11기, 불 피운 자리[爐址] 8기가 확인되었다. 신석기 시대 이른 시기 유물도 더러 나왔으나 대체로 말기인 기원전 2,000년 이후의 유적으로 보고 있다. 신석기 시대에는 일대가 섬이었다.

4. 시산리 유적(匙山里 遺蹟) : 한림면 시산리 66-6번지 일원으로, 낙동강 사구[모래언덕]에 형성된 유적이다. 분포 범위가 좁고 일부는 유실되었지만,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생활 유적이다. 각 층위와 층위에 포함된 유구의 시기가 불분명한 점이 많다. 크게 4개의 문화층으로 구분되는데, 제1 문화층의 제6 조개더미[貝殼]층이 훼손되지 않은 신석기 시대의 문화층이다. 재첩류와 굴이 확인되어 기수역으로 보인다. 신석기 시대의 가장 이른 시기인 융기문 토기도 출토되었다. 제2 문화층 이후에서는 신석기 시대와 그 이후 시기의 유물이 혼재하여 출토되었다. 낙동강의 범람으로 크게 훼손된 유적이다.

5. 장유동 유적(長有洞 遺蹟): 장유동 280번지 일원이며 현재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신석기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옛 해안선과 말목[木柱], 도토리 집적부, 습지의 디딤돌과 돌무더기 시설이 확인되었다. 도토리 집적부는 해안선에 잇대어 만들었던 도토리 저장 시설로 보고 있으며, 말목과 돌무더기 시설도 당시 해안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된다. 융기문과 침선문 토기, 돌도끼 등이 출토되었다.

그 외 수가동 1222번지의 장전유적(長田遺蹟), 주촌면 농소리 산10·농소리 산99번지 등에서도 신석기 시대의 유적이 알려져 있다.

[김해의 신석기 시대 특징]

김해의 신석기 시대 문화는 남해안 지역 신석기 시대 문화의 틀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유적의 성격별로는 조개더미 유적, 무덤, 야외노지, 도토리 저장 구덩이 등이 있으나, 남해안 해안 지역이나 섬에 비해 많지 않은 편이다. 옛 김해였던 수가리 유적나 범방 유적, 북정 유적, 가락 유적 등이 모두 부산으로 편입된 결과이기도 하다.

최근의 고 환경 연구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6천 년 전 무렵에는 지금보다 해수면이 훨씬 더 높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현재 김해평야는 물론 대동면 충적지, 어방동해반천의 안쪽, 주촌면과 장유의 저지 등은 모두 신석기 시대에는 바다로서 옛 김해만에 포함되었다. 한림면진영읍의 저지, 화포천의 안쪽 등도 낙동강 건너의 밀양 초동면, 삼랑진, 현재의 주남저수지 등과 함께 ‘옛 대산만’으로 밝혀졌다. 만의 주위에는 많은 신석기시대 유적이 남아 있었을 것이나 개발로 인하여 많은 유적이 없어져 버렸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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