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489
영어공식명칭 Dolmen
이칭/별칭 지석묘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선사/청동기
집필자 지병목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에서 발견되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

[개설]

고인돌은 커다란 덮개돌[上石]과 그를 받치고 있는 고임돌[支石], 그리고 지상 혹은 지하에 무덤방[墓室]을 만든 선사 시대의 대표적인 돌무덤이다. 고인돌이라는 이름은 커다란 덮개돌을 몇 개의 판석이나 막돌을 사용해 고인 형태에서 유래하였다. 한자로는 ‘지석묘(支石墓)’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석붕(石棚)’으로, 유럽에서는 ‘돌먼(Dolmen)’으로 불린다. 고인돌은 북유럽, 서유럽, 동남아시아와 중국 동남부 해안 지역 및 동북 지방, 그리고 일본 규슈[九州] 지방 등 세계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주로 신석기 시대 후기에서 청동기 시대에 걸쳐 만들어졌다. 고인돌 축조에 사용된 돌은 자연 상태 그대로이거나 커다란 암석에서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떼어낸 후 다듬어 사용하였다. 덮개돌의 크기는 1m 남짓한 작은 돌부터 100톤이 넘는 커다란 자연 암석 등으로 다양하다. 땅 위에 커다란 돌을 노출하여 무덤을 만들었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이 경외감을 느껴 이목을 끌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런 점 때문에 무덤의 기능 외에도 마을 공동체의 공동 집회나 제사 등 의식 행위의 장소 또는 상징물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인돌 축조와 특징]

초자연적인 물체에 경외심을 지닌 인간들에게 거대한 돌은 특별한 존재였을 것이다. 커다란 돌을 이용하여 만든 고인돌은 선돌(立石)[Menhir]이나 스톤헨지(Stonehenge)처럼 특별한 형태를 한 기념물들과 함께 인류가 만든 거석 기념물(巨石 記念物)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거대한 고인돌을 누가, 언제, 어떻게, 그리고 왜 세웠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고인돌 축조가 공동체 집단의 자발적인 협동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권력자의 강요나 사회 조직 내의 통제 아래 이루어진 [반]강제적 참여였는지도 주목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시 사회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인돌이 전국에 걸쳐 3만~4만 기 정도가 알려져 있으며, 특히 서해안과 남해안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2000년, 현재의 인천광역시 강화군과 전라남도 화순군 및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의 고인돌들이 공동으로 세계 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우리나라에 분포하는 고인돌의 형태는 크게 서너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가장 전형적인 형태가 ‘탁자식(卓子式) 고인돌’이다. 모양이 마치 돌로 만든 탁자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으로, 커다란 판석 2매~6매[보통 3매~4매]를 이용하여 땅 위에 [장]방형으로 세운 후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았다. 무덤방은 주로 지상에 있다. 한강 이북에서 많이 확인되고 있어 ‘북방식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반면, 마치 짧은 다리가 달린 바둑판을 닮았다 하여 ‘바둑판식[碁盤式] 고인돌’이라고 불리는 고인돌은 고임돌의 높이가 낮고, 상대적으로 덮개돌의 높이가 높은 형태이다. 주로 한강 이남에서 많이 발견되어 ‘남방식 고인돌’이라고도 부른다.

또 다른 형태는 마치 덮개돌만 땅 위에 달랑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이다. 이 경우는 지하에 판돌이나 막돌로 [장]방형의 무덤방을 만든 후, 그 위에 바로 덮개돌을 올려 고임돌이 없기 때문에 ‘무지석식(無支石式)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일부 고인돌 중에는 무덤방이나 덮개돌 주변에 돌을 깔아 일정한 무덤 구역을 표시한 예도 있다. 이렇게 납작한 판석이나 강돌, 혹은 막돌들을 사용한 깐돌[포석(鋪石), 부석(敷石)]로 묘역 시설을 갖추고 있는 고인돌은 더 정교하고 발전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여러 개의 고임돌이 돌아가면서 덮개돌을 받친 형태를 또 하나의 형식으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큰 범주에서는 탁자식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김해 지역의 주요 고인돌 유적과 특징]

해안가에 인접한 김해 지역에서도 다수의 고인돌이 발견되고 있다. 1900년대 초에 조사한 김해시 회현리 고인돌을 비롯하여, 내동[3기], 삼계동 화정[4기], 내덕리[1기], 무계리[1기] 등지에서 발굴을 통해 그 모습을 확인하였다. 대부분 몇 기에 불과한 소규모의 분포 양상을 보이고 있으나, 율하리 고인돌처럼 수십 기가 넘는 대규모의 예도 있다. 덮개돌이 훼손되거나 없어진 경우도 많다. 김해 지역 고인돌의 무덤방은 땅을 파고 막돌이나 넓적한 판돌로 네 벽을 쌓아 올려 만드는 돌널[石棺]이나 돌덧널[石槨] 모양이 많다. 무덤방 위에 덮개돌을 바로 올린 개석식 고인돌, 혹은 작은 받침돌을 고인 후 덮개돌을 올린 약화된 기반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덮개돌이 훼손되어 없어진 채 발견되면 돌널무덤[石棺墓]이나 돌덧널무덤[石槨墓]으로 분류될 수도 있다. 김해 서상동 지석묘(金海 西上洞 支石墓), 김해 수로왕릉(金海 首露王陵) 안의 고인돌이나 구지봉 고인돌은 덮개돌에 후대 사람이 글자를 새겨 다른 용도로 사용한 예이다.

명법동 고인돌 근처에서는 커다란 암석에서 고인돌 축조에 사용된 돌을 떼어 낸 채석(採石) 흔적이 확인되었다. 율하리 고인돌의 경우, 대규모 택지 개발 공사의 사전 작업으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어 많은 고인돌을 포함한 유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율하 유적(栗下 遺蹟)에서는 땅을 파서 내려갈 때 2단 이상으로 단을 두고 땅속 깊이 만든 대형 무덤방을 지닌 고인돌이 확인되었다. 무덤방 위를 넓적한 뚜껑돌로 막은 다음 그 위에 막돌이나 자갈을 이용하여 지표면까지 채운 후, 고임돌과 덮개돌을 놓았다. 주변에 돌들을 깔아 묘역 시설을 만든 예가 많은데, 이런 형태를 묘역식[혹은 구획식] 고인돌이라 분류하는 견해도 있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고인돌이 김해시 내동이나 대성동에서도 발견되었다. 율하 유적에서는 고인돌과 함께 주거지, 수혈 유구, 고상 건물터 등도 확인되었다.

김해 지역의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대부분 간 돌칼, 돌 화살촉, 숫돌 등의 석제품(石製品)이나 붉은 간 토기[紅陶] 등으로, 비교적 빈약한 부장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금속제 유물은 극히 드물게 발견된다. 김해 무계리 지석묘(金海 茂溪里 支石墓)에는 뚜껑돌의 크기[길이 6.1m, 너비 2.9m, 두께 1.3m]가 커서 마을에서 광석(廣石)이라 불리는 대형 고인돌이 있으며, 인근 고인돌에서는 간 돌검[磨製 石劍], 간 돌촉[磨製 石鏃] 등과 함께 양 날개가 달린 청동 화살촉[兩翼 銅鏃] 3점과 대롱옥[管玉] 3점, 붉은 간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내동 고인돌 등에서 일본 야요이[彌生] 토기 등 외지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당시 해상을 이용한 대외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김해 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택지 개발이나 인위적 훼손 등으로 점점 고인돌의 숫자가 줄어 가고 있다. 주촌 양동리망덕리, 천곡리 내연의 고인돌 등처럼 예전의 조사에서는 확인되었으나 현재 확인할 수 없는 고인돌들이 상당수라는 점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김해 구산동 지석묘(金海 龜山洞 支石墓)는 무게 350톤으로 추정되는 한반도 최대의 덮개돌[길이 10m, 너비 4.5m, 두께 3.5m]과 정교한 묘역 시설, 그리고 외곽을 두른 구덩이[周溝]까지 갖춘 고인돌로 주목받았으나, 최근 정비 과정에서 원형을 훼손하는 등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여 유적의 보존과 관리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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