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296 |
---|---|
한자 | 六伽耶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가야 |
집필자 | 김양훈 |
[정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비롯해 경상남도, 경상북도 일대에 분포한 6개의 가야 소국을 가리키는 역사 용어.
[개설]
‘6가야’는 『삼국유사』「가락국기」의 육란설화와 『삼국유사』 오가야조를 근거로 만들어진 개념어이다. 「가락국기」 육란설화의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라 하고 [중략] 곧 여섯 가야 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는 기록과 오가야조의 “한 개는 수로왕이 되고, [중략] 아라가야[함안], 고령가야[함창], 대가야[고령], 성산가야[경산 혹은 벽진], 소가야[고성]이다”는 기록과 결부하여 만들어진 역사 용어이다. 한편, 오가야조의 다섯 가야는 『본조사략』의 기록과는 다른데, “『본조사략』에는 태조 천복 5년 경자에 5가야의 이름을 고쳤다. 금관[김해], 고령[성주], 비화[창녕], 아라와 성산이다”라고 적혀 있다. “천복”은 후진(後晋) 고조의 연호로 경자년은 태조 23년인데, 이같이 오가야조와 『본조사략』에 기재된 국명이 서로 다른 것은 고려 건국 후 지방 호족들이 가야소국의 왕손임을 인정받아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940년(태조 23) 지방제도 개편 당시 현실 세력에 맞추어 5가야의 이름을 변경하였고, 그것이 『본조사략』에 기재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6가야는 『삼국유사』를 제외한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의 가야사 관련 문헌이나 금석문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가야”는 나말여초에 지역사회에서 등장하여 널리 보급되면서 문자로 정착된 막연한 인식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있다.
[6가야의 개념]
6가야의 개념은 종래에 『삼국유사』「가락국기」의 육란설화와 오가야조에 근거하여 가야가 멸망하는 6세기 후반까지 존재했던 6개의 부족 연맹으로 정의되었고, 최근까지도 각종 역사 관련 대중서나 교과서에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가야사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6가야’라는 개념의 연원에 대해 추적하였고, 일부 연구자들은 6가야의 개념에 대해 신라 후기~고려 초 반신라 및 자치 독립의 이념을 표방한 영남 주요 지역의 세력들이 옛 가야의 계승을 내세웠던 관념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최근에는 6가야의 한 축인 김해가 나말여초 당시 친신라계였고, 함안은 신라에 대한 절의를 내세웠다는 이유로 반신라적이고 독립적이라는 전제가 성립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었다. 또한 나말여초에 6가야 개념이 태동했거나 구전이 문자로 채록되었다는 증거가 없고, 오히려 고려 문종대 인주 이씨 세력의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