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2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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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開皇錄』 |
이칭/별칭 | 개황력(開皇曆)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이영식 |
[정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있었던 가락국의 역사서.
[편찬시기]
『개황록(開皇錄)』 혹은 『개황력(開皇曆)』은 532년 가락국의 멸망 이후부터 「가락국기」가 편찬되었던 1076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 편찬되었던 가락국에 대한 역사서이다. 서명의 ‘개황’에 대해서는 중국 수나라의 연호[581~600년]로 보거나 ‘황조(皇朝)를 연다’라는 일반적 표현으로 보는 견해로 나뉘고 있다.
편찬 시기에 대해 개황을 수나라 연호로 보는 견해에서는 가야 계통의 무열왕비 문명왕후와 김유신의 위상이 절정에 달하였고, 김해 지역의 금관군이 금관소경으로 승격되었던 문무왕 대를 전후한 시기에 편찬되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반면에 개황을 일반 명사적인 표현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595년(개황 15)에 탄생한 김유신이 673년에 사망하여 매장된 금산원의 비문이나 후손들의 가문적 칭송을 위해 작성되었던 것으로 보기도 하였고, 가락국의 외손인 문무왕 재위 중 시행되었던 수로왕릉의 정비를 계기로 편찬되었다는 추정도 있었다. 779년(혜공왕 15)에 김유신의 혼령이 후손들이 주살되었던 것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했다는 ‘미추왕릉 사건’ 이후에 몰락해 가는 김해 김씨 가문의 회복을 위해 ‘개황’과 같은 과장된 수식의 편찬이 있었다는 견해가 있는데, 김유신의 현손인 장청(長淸)이 김유신 전기의 「행록」10권을 편찬했던 시기와 내용에서 겹치고 있다.
『삼국사기』가 「행록」10권에 대해 “꾸며낸 말이 많았다”고 평했던 것과 상통하는 점이 있기 때문에, 이와 비슷한 시기의 편찬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내용]
‘개황력’과 ‘개황록’은 약간 다른 명칭이지만 동일한 역사서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인용된 서목과 내용의 일부가 남아 있을 뿐으로 원전은 전하지 않는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단 두 차례만 인용되었는데, 가락국 건국의 시조와 멸망에 관한 기술에 국한되어 있다. 『개황력』에서는 “성은 김씨로 대개 세조가 금란(金卵)에서 난 까닭에 김(金)으로 성을 삼았다”는 내용이 인용되었다. 가락국 건국에 관한 역사보다는 김해 김씨의 유래와 자존의식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서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황록』에서는 “양나라 중대통 4년[532년] 임자(壬子)에 신라에 항복하였다”는 가락국 멸망의 역사가 인용되었다. 가락국의 건국과 멸망에 모두 인용되었던 것으로 보아 가락국사 전반에 관한 역사서였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력(曆)’이란 명칭처럼 가락국사 보다는 가락국의 왕력, 곧 연표에 불과한 기록이 아니었을까하는 추정도 있고, ‘록(錄)’이란 명칭처럼 김유신 등과 같은 가락국의 후손을 포함한 김해 김씨 집안의 위상에 대한 분식(粉飾)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