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소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28
한자 金官小京
이칭/별칭 금관경,김해소경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
집필자 김광철

[정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설치되었던 신라 통일기의 특별 행정 구역.

[개설]

신라 통일기의 지방 제도는 9주 5소경 체제이다. 금관가야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통합된 후 신라의 금관군, 가야군으로 편제되었다가 680년(문무왕 20) 5월 금관소경(金官小京)으로 승격하였다. 경덕왕 16년 군현 개편 때에는 김해소경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신라 통일기의 지방 제도는 9주 5소경 체제이다. 신라 시대에는 지방 제도로서 주군 제도와는 별도로 특수 행정 구역으로 왕경을 모방한 소경(小京)을 설치하였다. 514년(지증왕 15)에 아시촌(阿尸村)에 소경을 처음 설치한 이후, 557년(진흥왕 18)에 국원소경(國原小京), 639년(선덕여왕 8)에 북소경(北小京)을 설치하였으나, 이 가운데 국원소경만 통일 후에도 남아 있었다. 여기에다 678년(문무왕 18)에 북원소경(北原小京), 680년에 금관소경(金官小京), 685년(신문왕 5)에 서원소경(西原小京)과 남원소경(南原小京)을 설치하여 5소경제가 완성되었다. 소경의 설치 목적은 수도가 한쪽에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여 지방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신라에 흡수된 가야와 고구려·백제 세력을 견제하거나 회유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관련 기록]

금관소경에 대한 기록은 주로 『삼국사기』에서 확인되는데, 「신라본기」 문무왕 20년 5월조에서 가야군에 금관소경을 설치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으며, 헌덕왕 14년 3월조에서는 김헌창금관소경 등을 장악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지리지」 김해소경조에서도 문무왕 20년에 금관군을 소경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내용]

신라 통일기 금관소경의 권역은 당시 소경의 영역이 2~3개의 영현을 거느린 군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나말여초 김해부의 권역, 여말선초 웅신현(熊神縣)과 완포현(莞浦縣)을 속현으로 가진 김해도호부의 권역 정도였을 것이다. 소경에는 군현이 설치되지 않았고, 곧바로 소경-촌으로 연결되는 구조였기 때문에 신라 통일기 금관소경에도 수많은 자연촌이 분포되어 있었다. 이들 자연촌 가운데는 촌 행정의 중심지로서 지역촌 또는 행정촌이 지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금관소경은 소경성인 분산성(盆山城)을 배경으로 하여 소경의 중심 읍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곳에는 소경의 관아가 자리잡았고, 중앙에서 파견된 소경의 장관인 사신(仕臣)과 법당주(法幢主) 등 몇몇 군관들이 여기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소경의 장관인 사신은 일반 행정의 책임자이면서 소경의 치안 유지와 군사 지휘의 권한을 가지며, 노동력의 징발, 조세 및 공물의 징수권과 함께 사법권을 행사하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소경의 촌주는 3~4개 촌을 관할하였다고 보는데, 주로 사신을 보좌하여 촌락 행정을 담당하고, 때에 따라 군사적 업무도 수행하였다.

[변천]

757년(경덕왕 16) 군현 개편때에는 김해소경으로 개칭되었으며, 822년(헌덕왕 14) 3월에 발생한 김헌창의 난으로 한때 김헌창 세력이 통제하는 지역으로 바뀌었다. 신라 말 김해 지역에도 호족 세력이 등장하자 중앙 정부는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김해소경을 김해부로 개편하였다.

[의의와 평가]

금관소경의 설치는 신라 정부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수도의 편재성을 보완하여 중앙집권적 군현(郡縣)체제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된다. 아울러 통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가야 출신 김유신의 공로를 포상한 것으로,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들에 대한 특별한 배려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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