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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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土姓 |
영어공식명칭 | Indigenous Family Nam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김광철 |
[정의]
조선 시대 이전부터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살고 있었던 토착 성씨.
[개설]
조선 전기 지리서인 『경상도지리지』[1425년]와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는 전국의 고을 별로 성씨를 소개하고 있는데, 성씨의 종류는 토성(土姓)·망성(亡姓)·내성(來姓)·속성(續姓)·촌성(村姓) 등으로 분류하였다. 토성(土姓)이란 해당 군현의 토착 성씨를 일컫는 것으로, 고려 초기 이래 성씨 관계 자료에 기재되어 있었고, 지리지 편찬 당시까지도 해당 고을에 살고 있는 성씨를 지칭한 것이다. 한편, ‘토(土)’는 지역·지연의 상징인 본관을 뜻하는 것이었고 ‘성(姓)’은 혈연의 성씨를 의미하였다는 점에서 토성은 본관과 성씨를 합쳐 부른 것이기도 하였다.
[고려 시대 김해 토성]
고려 시대 토성은 나말 여초 지방 세력인 호족의 후예로서 신라 후기 사회 변동과 고려 군현 체제의 정비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신라 후기 농민 항쟁이 전개되는 가운데 각 지역에서는 성주(城主), 장군, 지주제군사(知州諸軍事) 등으로 불리는 지방 세력가들이 등장하였다. 그 출신은 해상 세력, 촌주 출신, 지방관 및 낙향 귀족, 군진 세력 등이었다. 이들은 신라 후기 호부층으로서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다가 항쟁 세력을 끌어들여 군사적 기반을 갖추고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이들 호족은 그들이 맡고 있었던 당대등(堂大等)·대등(大等) 관할 하에 호부(戶部)·창부(倉部)·병부(兵部) 등으로 구성된 독자적 행정 조직인 관반 체제를 갖추고 지역을 지배하였다. 김해의 호족인 김인광(金仁匡)과 소충자(蘇忠子)·소율희(蘇律熙) 형제도 이같은 관반 조직으로 김해 지역을 통제하고 있었다.
고려 건국 후 후삼국 통합을 거쳐 지방통제가 강화되자 호족들은 ‘호장’, ‘부호장’으로 그 호칭이 격하되었고, 이들은 군현의 ‘향리(鄕吏)’, ‘이족(吏族)’으로 자리하였다. 향리는 장리(長吏), 외리(外吏)라고도 불렀고, 군현의 읍격에 따라 주리(州吏)·부리(府吏)·군리(郡吏)·현리(縣吏)·역리(驛吏)·부곡리(部曲吏) 등으로 호칭되었다.
고려 시대 재지 세력인 토성층은 형성된 시기부터 끊임없이 분화하고 있었다. 토성층은 정치적 경제적 타격을 받아 토성의 지위를 상실하거나 본관지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토성 내에서 이족과 사족으로 나누어져 거주지를 달리하면서 지속적으로 분화해 갔다. 특히 장기간의 전쟁 상태는 토성층의 몰락을 가져왔다.
고려 후기 김해 지역 사회가 겪어야 했던 무인집권기 농민 항쟁과 삼별초 항쟁,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 왜구의 침입 등은 주민의 이동과 유망민의 발생을 촉진시키면서 김해 지역 토성층의 분화를 가져오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김해 지역의 내성(來姓)은 해주 정씨와 장양 맹씨 둘로 나타나고 있어, 다른 지역 토성의 김해 이주가 상당 정도 제한적이었던 반면, 김해 지역 토성이 다른 지역의 내성과 속성이 된 사례가 많은 것은 김해 지역의 토성층 분화가 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 시대 김해 토성]
『세종실록지리지』에 소개된 김해도호부의 토성은 김(金)·허(許)·배(裵)·손(孫)·송(宋)·유(庾) 등 여섯이었으며, 내성은 해주 정씨와 장양 맹씨 둘이었다. 조선 전기까지 김해의 속현이었던 웅신현의 토성은 서(徐)·주(州)·유(劉) 등 셋이었고, 내성은 김해 김씨 하나였다. 완포현의 성은 전(田)씨 하나였으며, 당시까지 김해의 부곡으로 기능하고 있던 대산부곡의 성은 전(田), 천읍부곡의 성은 공(公)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린 김해도호부의 토성이 모두 이 지역 호족 출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김씨와 허씨는 나말 여초 호족으로서 지역을 지배하다가 재지 세력인 토성으로서 지위를 유지한 것이지만, 송씨 등 4개 성씨는 고려 중기 이후 김해의 향리로 진출하면서 토성으로 분류되었다. 김해 송씨의 경우 우왕 대에 대사헌을 역임했던 송천봉(宋天逢)을 시조로 삼았고, 분성 배씨의 경우 우왕 때 병부상서를 지낸 배원룡(裵元龍)의 조부 배헌(裵軒) 때에 김해로 이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이후에야 김해의 토성층에 포함되었다.
[김해 지역 대표적 토성]
김해 김씨는 조선 전기까지 가깝게는 경상도의 동래에서부터 성주에 이르기까지 11곳으로 이주하였으며, 전라도 여산, 경기도 장단에도 분포하였고, 멀게는 평안도 의주·정주·자산, 함경도 원흥진까지 진출하였다. 김해 김씨는 『여지도서』 단계인 조선 후기에 더욱 분화하여 전국 여러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으며, 특히 전라도에서는 고부를 비롯해 18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김해 허씨도 조선 전기까지 의창, 울산, 기장 지역으로 분화해 갔으며, 조선 후기에는 강원도 고성, 평안도 창성 지역에도 분포하였다. 김해 손씨는 밀양의 속현이었던 수산현과 평안도 양암진의 내·속성이 되었고, 웅천 주씨도 조선 초기까지 흥해군과 청하현으로 분화해 갔으며, 조선 후기에는 울진, 전라도 광양으로 이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