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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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憲昌亂 |
영어공식명칭 | Kim Heon-chang's Rebelli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김광철 |
[정의]
822년 웅천주 도독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켜 경상남도 김해 지역을 장악했던 사건.
[개설]
김헌창의 난은 822년(헌덕왕 14) 3월 웅천주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란이었다. 9주 5소경 가운데 김해 지역을 포함한 5개 주와 3개 소경을 장악하였고,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으로 정할 정도로 기세가 막강하였으나 한 달이 못되어 결국 진압되었고 김헌창은 자결하였다.
[역사적 배경]
김헌창은 선덕왕(宣德王) 사후 김경신(金敬信)과 왕위계승 경쟁을 벌이다 패배한 김주원(金周元)의 아들이다. 김경신이 38대 원성왕으로 왕위에 오른 후, 김주원은 명주(溟州)로 퇴거하였고, 큰아들 김종기(金宗基)와 손자 김정여(金貞茹)는 연이어 시중을 역임하는 등 원성왕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반면, 차자인 김헌창은 원성왕계와 반목하며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와 함께 진골 귀족들의 치열한 권력 투쟁으로 말미암은 정치 질서의 붕괴, 자연재해와 사회 경제적 모순에 따른 심각한 민생 문제 등이 난을 일으키는 배경이 되었다.
[경과]
김헌창은 807년(애장왕 8) 1월 이찬(伊湌)으로서 시중에 임명되었으며, 813년(헌덕왕 5) 1월에는 무진주(武珍州) 도독으로 나갔다가, 814년 8월에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시중이 되었다. 816년 1월 헌덕왕은 김헌창을 청주(菁州) 도독으로 내보냈다가, 821년 4월에는 웅천주 도독으로 전보시켰다. 반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의 일이었다.
822년(헌덕왕 14) 3월 김헌창은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으로 정하고 웅천주를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신라 왕조 자체를 부정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고 봉기한 것이었다. 김헌창의 군대는 무진주, 완산주, 청주(菁州)[진주], 사벌주(沙伐州)[상주] 4개의 주와 국원경, 서원경, 금관경 3개의 소경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기간에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산주(漢山州), 우두주(牛頭州)[춘천], 삽량주(歃良州)[양산], 패강진(浿江鎭)[평산], 북원경(北原京)[원주] 등의 지역은 장악되지 않았다. 청주 도독 향영(向榮)도 탈출하여 추화군(推火郡)[밀양]으로 숨어들었다.
[결과]
822년 3월 18일 점령지였던 완산주의 장사(長史) 최웅(崔雄) 등이 탈출하여 왕경으로 도망쳐 들어가 김헌창의 반란을 보고하면서, 정부의 토벌군이 편성되고 반란 진압이 시작되었다. 이찬(伊湌) 균정(均貞), 잡찬 웅원(雄元), 대아찬(大阿湌) 우징(祐徵) 등이 3군을 통솔하여 정벌에 나섰다.
김헌창 군대는 삼년산성(三年山城) 전투, 속리산(俗離山) 전투, 성산(星山)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였고, 웅진(熊津)으로 후퇴하였는데, 이 곳에도 진압군이 들이닥쳐 목을 베어 죽이거나 사로잡은 포로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김헌창은 겨우 몸을 피하여 성안에 들어가 수비를 강화하였으나, 10일 만에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김헌창은 성이 함락되기 전에 자결하였으며, 그를 따랐던 무리들 239명도 처형당하였다. 이후 825년(헌덕왕 17)에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이 한강 이북의 고달산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의의와 평가]
김헌창의 난은 신라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누적된 결과로 일어났으며, 신라에서 중앙 귀족 출신자가 지방민을 규합하여 일으킨 유일한 반란이었다. 김헌창의 난 이후로 무열왕계는 중앙 정계의 주도적인 위치를 상실하였고, 왕위계승 쟁탈전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지방에서는 농민 항쟁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가운데, 호족 세력이 등장하여 지역을 지배하게 되면서 신라 사회의 해체를 앞당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