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 항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20
한자 三別抄抗爭
영어공식명칭 The Resistance of Sambyeolcho
이칭/별칭 삼별초 반란,삼별초의 난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신은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270년 6월연표보기 - 삼별초 항쟁 발발
전개 시기/일시 1271년 1월 - 금주방어사 김훤 등이 방보 등의 반란 진압
종결 시기/일시 1273년연표보기 - 삼별초 항쟁 종결
발생|시작 장소 삼별초 항쟁 - 강화도
종결 장소 삼별초 항쟁 - 제주도
성격 반란사건
관련 인물/단체 배중손|노영희|김통정|방보|계년|박평|김훤

[정의]

고려 정부의 몽골 투항에 반대하여 일으킨 삼별초 항쟁에 대한 경상남도 김해 지역의 대응.

[개설]

삼별초는 최우가 도적을 잡기 위해 설치한 야별초의 좌별초와 우별초에, 몽고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해 온 군사들의 조직인 신의군으로 구성된 군사집단이었다. 삼별초는 고려가 몽골과 화의하는 것에 반대해 강화도의 구정에서 “오랑캐 군사가 와서 민들을 살육하니 무릇 나라를 위하는 자들은 모두 구정(毬庭)에 모이라”고 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삼별초는 진도를 근거지로 하였다가 진도가 합락된 이후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 저항하다 끝내 여몽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1271년 1월 삼별초 봉기에 호응하여 밀양 사람 방보(方甫), 계년(桂年), 박평(朴平) 등이 부사 이이(李頤)를 죽이고 봉기에 가담하였으나, 김해 지역은 삼별초 봉기에 적대적이었고 금주방어사 김훤은 방보 등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역사적 배경]

삼별초는 홍문계와 송송례를 도와 임유무를 제거하는데 힘을 보태었으나 원나라에 입조한 뒤 고려로 귀국하던 원종은 무장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려 하였다. 원종은 장군 김지저(金之氐)를 강화도에 보내 삼별초를 혁파하였다. 김지저가 삼별초의 명부를 가지고 개경으로 돌아가자, 삼별초는 자신들의 명부가 몽고에 들어갈 것을 염려해 마침내 봉기하였다. 삼별초가 봉기하여 진도로 근거지를 옮기자 밀양은 삼별초에 호응해 봉기하였으나 김해 지역은 봉기에 가담하지 않았고 오히려 밀양의 봉기를 진압하였다. 밀양과 김해는 모두 낙동강 연해의 대읍으로 동남 연해 지역의 요충지였기에 삼별초와 개경 정부에게 이들 지역은 중요한 거점이었다. 특히 삼별초는 일본에 첩장을 보내 일본과 연대하려 하였고 여몽연합군은 일본 정벌을 계획하였으므로 일본으로 가는 전초 기지였던 금주의 향방은 양측에 매우 중요하였다.

[경과]

1270년 6월 배중손 등은 금강고(金剛庫)에서 무기를 꺼내 동조자들에게 준 뒤,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왕으로 옹립하고 강화도에 있던 관리들의 가족들을 끌고 진도로 들어갔다. 이에 밀양 사람 방보(方甫), 계년(桂年), 박평(朴平) 등이 부사 이이(李頤)를 죽이고 인근 고을에 통문을 보내 동조를 요구하였다. 김해는 밀성군의 반란에 동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금주방어사(金州防禦使) 김훤(金晅)은 계책으로 밀양의 봉기를 진압해 삼별초가 동남연해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차단하였다. 이에 삼별초는 1271년(원종 12) 4월 금주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당시 삼별초의 공격은 매우 거세었기에 금주의 방호장군 박보는 김해의 별초들을 거느리고 산성으로 도주해야만 했다. 당시 삼별초는 김해를 불태우고 약탈한 뒤 철수하였다.

[결과]

1271년 4월 금주를 침략하여 불태운 후, 삼별초는 다시는 금주를 공격하지 못하였고, 일본 정벌의 전진 기지였던 금주는 개경 정부의 편에서 요충지를 방어하였다.

[의의와 평가]

금주는 밀양의 반란을 진압하고 삼별초와 싸운 공로를 인정받아, 금녕도호부로 승격하였고 이후 도호부는 조선 시대까지 김해의 읍격으로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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