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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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進禮城諸軍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관직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신은제 |
[정의]
신라 후기 진례와 김해 지방의 호족이 칭한 관직.
[개설]
신라 후기 각 지역의 농민 반란으로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김해의 진례성을 장악한 호족에게 신라 정부가 내려준 관직명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신라 진성여왕 이후 잦은 농민 반란으로 경주의 중앙 정부는 더 이상 지방을 통치할 수 없게 되었다. 각 지방에서는 성주, 장군을 지칭하는 유력자들이 출현하였는데, 통상 이들을 호족이라 한다. 호족들은 스스로를 성주, 장군이라 칭하기도 하였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지주제군사(知州諸軍事)라 칭하기도 하였다. 진례성제군사로 칭해진 인물은 김인광(金仁匡)과 김율희(金律熙)[소율희] 등인데, 김인광이 먼저 진례성제군사를 지냈고 이후 김율희 혹은 소율희가 그 직을 맡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김인광이 진례성제군사의 직임을 맡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효공왕[897~911] 초년으로 판단된다.
[담당 직무]
진례성제군사는 군사적으로 진례를 포함한 김해 지역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었다. 군권을 장악하고, 진례 지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였는데, 조세를 징수하거나 사법적 권력을 행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당시 덕망있는 승려였던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를 모시기도 하였다.
[관련 기록]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명(昌原 鳳林寺 眞鏡大師 寶月凌空塔碑銘)」에 ‘진례성제군사’라는 관직명이 등장하는데, “대사가 진례(進禮)에 이르러 잠시 머물렀는데, 이에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김율희(金律凞)가 도를 사모하는 마음이 깊고 가르침을 들으려는 뜻이 간절하여, 경계 밖에서 마중하여 성 안으로 맞이하였다.”라는 문구가 있다.
[변천]
진례성의 초기 지배자는 김인광이었으나 이후 김인광을 대신해 소충자(蘇忠子)·소율희 형제가 진례와 김해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920년 견훤이 대야성을 거쳐 낙동강을 따라 세력을 확대하면서 소율희 형제가 지배하던 진례성은 견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 즈음 김해 지방에 대한 소율희 형제의 통치력도 소멸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가 갈리고 있다. 진례성을 지금의 창원과 김해 경계에 있는 비음산에 위치한 진례산성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진례면 송정리와 신안리에 위치한 토성을 신라 말 고려 초의 진례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의의와 평가]
진례성제군사는 진례성을 중심으로 한 김해 지역에서 활동했던 호족들의 직명을 보여주고 있으며, 호족들이 선승(禪僧)들과 교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 신라 말 고려 초 김해 지역의 정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