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3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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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州防禦使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관직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신은제 |
[정의]
1012년부터 1270년까지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설치된 고려 시대 지방 관직.
[개설]
995년(성종 14) 10도제와 12절도사 제도를 시행하면서 김해 지역은 금주안동도호부가 되었으나 1012년(현종 3) 12절도사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금주안동도호부는 금주방어사로 강등되었다. 금주방어사는 1270년(원종 11) 금주방어사 김훤이 삼별초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금녕도호부로 승격할 때까지 김해의 읍격이 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방어사는 995년(성종 14) 군사적 성격이 강한 12절도사 제도를 시행하면서 처음 설치되었다. 원래 방어사는 중국 당나라 때 안사(安史)의 난 이후 군사적 성격이 강한 절도사 체제 하에서 설치된 지방 제도였는데 995년(성종 14) 지방 제도의 정비 과정에서 고려에서도 시행되었다. 이 때 설치된 방어사는 주로 고려 북방의 양계 지역과 황해도 일원에 집중되어 있었다. 995년(성종 14) 절도사 중심의 지방 제도는 1005년(목종 8) 절도사 아래 관찰사·단련사·자사 등을 혁파하면서 1차 조정을 거쳤으며 현종 즉위 후 성종 대와는 다른 지방 제도로 정비되었다. 1012년 현종은 12절도사 제도를 폐지하고 5도호 7주 안무사를 설치하였는데, 금주안동도호부였던 김해는 금주방어사로 강등되었다. 1012년 금주방어사의 설치는 전체적으로 성종대 군사적 성격이 강한 절도사 제도의 폐지와 함께 이루어진 조치이나, 이 즈음 당시의 관내도[지금의 황해도와 경기도 일원]에 설치된 방어사 대부분이 폐지된 반면 경주와 금주에는 새롭게 방어사가 설치되었다. 경주는 1014년(현종 5)에 다시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지만 김해는 방어사로 남았다. 당시 경주와 김해에 방어사가 설치된 배경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진 바 없으나, 목종과 현종 대 동여진 해적이 창궐했던 것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담당 직무]
동남 연해의 방어를 책임지고 요충지를 관할하였던, 군사적 성격을 강하게 가지는 지방관이었다.
[관련 기록]
『고려사』 권57, 지리지2, 경상도 금주 연혁 조에는 “원종(元宗) 11년[1270년]에 방어사(防禦使) 김훤(金晅)이 밀성(密城)의 반란을 진압하고, 또 삼별초(三別抄)를 막는 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격시켜 금녕도호부(金寧都護府)가 되었다.”라는 표현이 있어, 금녕도호부로 전환된 시점을 1270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고려사』 1271년 1월 기사에 실린 전년도 상황에 대한 세가의 기록이 있는데, 『고려사』 권27, 원종(元宗) 12년 1월 병술일[22일] 기록에 “안찰사(按察使) 이오(李敖)[어떤 기록에는 이숙진(李淑眞)이라고 되어 있다.]가 금주방어사(金州防禦使) 김훤(金晅), 경주판관(慶州判官) 엄수안(嚴守安)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갑자기 도착하자 조천 등이 방보 등을 죽이고 항복하니 적이 마침내 평정되었다.”라고 하여, 금녕도호부로 바뀌기 전 금주방어사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변천]
금주방어사는 1270년(원종 11년) 금녕도호부가 되면서 폐지되었고, 이후 개항기까지 김해 지방은 도호부의 읍격을 가졌다.
[의의와 평가]
1012년 이후 김해 지역의 읍격을 보여주며, 특히 김해 지역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