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3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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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省法驛 |
이칭/별칭 | 성잉역(省仍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양훈 |
[정의]
고려 전기부터 1896년까지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산본리에 있었던 역참.
[개설]
성법역(省法驛)의 본래 이름은 성잉역(省仍驛)으로서 고려 시대 22역도 중 금주도에 속한 31개 역 중 하나였다. 조선 시대에는 세조 연간에 41역도제로 개편하면서 자여도(自如道)에 속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성법역이 언제 처음 설치되었는지는 기록으로 전하지 않는다. 다만, 고려 현종 연간[1010~1031년]에 육상교통망 22역도를 정비하면서 금주도에 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기록]
성법역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 권82, 지36, 병2, 참역에 “금주도(金州道)는 31역(驛)을 관장한다. 덕산(德山)·성잉(省仍)·적항(赤頂)·금곡(金谷)·대역(大驛)[금주(金州)]…”라고 적혀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425년에 간행된 『경상도지리지』 김해도호부에 “역이 6개 있는데…성법(省法)…”이라고 적혀 있다. 이후부터 『조선왕조실록』, 『경국대전』,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 다양한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에는 역의 현황에 대해 보다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성법역원은 부의 서쪽 28리에 있다. 동쪽으로 남역이 30리, 남쪽으로 적항역이 20리, 서쪽으로 창원 자여역이 15리, 북쪽으로 대산역이 45리 떨어져 있다, 대마 2필, 중마 2필, 복마 8필, 역리 53인”이라고 적혀 있다. 1804년에 작성된 「가경구년자여도갑자식형지안(嘉慶九年自如道甲子式形止案)」에 기록된 성법역에는 역리 146명, 일수(日守) 2명, 보인 45명이 있었으며, 역참을 운영한 주요 성씨는 남원 양씨, 김해 김씨라고 전하고 있다.
한편 『중종실록』에는 성법역이 1510년 삼포왜란 당시 김해부사 유담년(柳聃年)이 웅천성을 구하기 위해 진을 쳐 협공을 대비한 사실이 적혀 있다.
[변천]
성법역은 고려 시대 금주도의 31역 중 하나였다. 조선 시대에는 1457년 경상도 관찰사가 역의 통합을 계청할 때 남역과 통합하여 역참 운영을 원활하게 하였다. 그러나 1462년(세조 8) 8월 5일 각 도의 역로를 정비할 때 남역과 함께 자여도 역승(自如道 驛丞)에 포함된 13역 중의 하나가 되었다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된 전국 41개 역도 중 자여도에 속한 15역 중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1896년(고종 33) 1월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성법역은 조선 시대 자여도와 김해의 옛 길을 복원하고, 역참 운영을 연구하는데 주요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