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3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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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鄕廳 |
영어공식명칭 | Hyangcheong |
이칭/별칭 | 유향소,향소,향사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백지국 |
[정의]
조선 시대 김해부사의 행정을 보좌하던 향촌 자치 기구.
[개설]
향청(鄕廳)은 조선 시대 김해도호부 재지 사족의 동향을 보여주는 기구 중 하나였다. 조선 전기 유향소(留鄕所) 등으로 불리며 향촌 자치 기구로 활용되었고, 조선 후기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 구조가 흔들리고 수령권이 강화됨에 따라 점차 수령을 보좌하는 기구로 변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왕조 창건을 주도한 신진사대부는 왕조 개창을 전후하여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향촌의 토지와 노비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기구가 필요하였다. 동시에 고려 시대까지 실질적으로 군현의 지배권을 가지고 있던 이족(吏族)을 배제하고 사족(士族)[양반] 중심의 향촌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이해 관계 속에 향촌 사회에 유향소가 설치되었고, 유향소는 조선 전기까지 재지 사족들의 대표적인 향촌 자치 기구로 활용되었다.
[관련 기록]
김해 향청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기록은 김일손(金馹孫)이 쓴 「회로당기(會老堂記)」가 있다. 「회로당기」는 1491년(성종 22) 김해를 방문했던 김일손이 김해 김씨 시조 능인 수로왕릉(首露王陵)을 배알한 뒤 지은 것으로, 유향소 건물인 회로당의 내력과 운영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유향소에 참여하였던 인적 구성에 대한 자료로 『김해향안(金海鄕案)』과 「향록천(鄕錄薦)」 등이 있으며, 운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완의(完議)」 등의 고문서가 전해진다. 이밖에 『여지도서(輿地圖書)』 등 조선 후기에 간행된 지리지류에서도 향청에 관한 기사를 확인 할 수 있다.
[변천]
문헌 자료를 보면 김해 지역 향청은 유향소, 향소(鄕所), 향사당(鄕社堂) 등으로 불렸다. 조선 전기에는 유향소로 불렸는데, 유향소는 고려 후기 사심관 제도가 혁파된 뒤 중앙의 경재소와 함께 각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설치되었다. 공적 기구였던 사심관제와 달리 경재소와 유향소는 사적 기구였으므로 이에 대한 공식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 더군다나 자치적 성격의 유향소는 관권 중심의 향촌 지배 체제를 형성하고자 한 조선 정부의 의도와 상반된 성격이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 여러 차례 치폐를 거듭하게 되었는데, 이와 관련된 기록 또한 상세하지 않다. 그 결과 김해 지역 유향소의 건립 시기는 명확히 알 수 없으며, 다른 지역과 비슷하게 고려 말~조선 초 유향소가 설치되었고, 이후 치폐를 반복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해 지역 유향소의 내력은 김일손이 쓴 「회로당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회로당은 복설된 유향소 건물의 이름으로 1491년 김해 지역 양반들이 건립하였다. 이곳에서 김해 지역의 유력 양반들은 수령을 보좌하는 동시에 향음주례(鄕飮酒禮) 등을 설행(設行)하면서 성리학적 명분을 쌓았고, 수로왕에 대한 제사를 지냄으로써 지역적 전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을 확보하며 김해 지역 향권을 주도해 갔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1742년(영조 18) 회로당을 김해 수로왕릉 곁으로 옮겨 세웠다. 『여지도서』를 보면 궁실(宮室) 조에 회로당, 공해(公廨) 조에 향사당(鄕射堂)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향청 건물이 따로 마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제작된 「해동지도(海東地圖)」에도 읍성 안에 유향소 건물로 ‘향소’가 확인된다. 명칭의 변화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김해 지역 향청은 조선 전기 유향소라 불리다가 조선 후기 점차 향소 등으로 불리면서 양반들의 향촌 자치 기구보다는 수령을 보좌하는 기구로 성격이 변화해 갔다.
[의의와 평가]
향청은 조선 전기 재지 양반들의 대표적인 향촌 자치 기구였으나, 조선 후기 점차 수령을 보좌하는 기구로 성격이 변화하였다. 이러한 향청의 성격 변화를 통해 조선 시대 김해 지역 재지 사족의 동향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