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평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86
한자 衡平 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하지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3년 7월연표보기 - 형평사 김해분사 설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3년 8월연표보기 - 김해형평사사건 발생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전개된 백정의 신분 해방을 목적으로 한 사회 운동.

[개설]

일제 강점기 백정(白丁)에 대한 사회적 신분 차별을 철폐할 목적으로 전개된 형평 운동은 1923년 4월 25일 진주에서 형평사(衡平社)가 창립되면서 본격화하였다. 형평사는 5월 13일 창립 축하식을 거행하였으며, 5월 14일에는 지방 대표자 회의를 열고 전국 각 도에 형평사 지사(支社), 각 군·읍에 형평사 분사(分社)를 설치할 것을 결의하였다.

[형평사 김해분사의 설립]

형평사 김해분사는 1923년 7월 설치되었으며, 창립 축하식이 8월 11~12일 이틀에 걸쳐 사립 합성학교[현 김해합성초등학교]에서 열렸다. 창립 축하식은 김해청년회와 김해여자청년회가 후원하였으며, 진주 형평사 본사의 위원장 강상호(姜相鎬), 김해청년회 대표 안효구(安孝駒), 김해교육회 대표 인동철(印東哲), 사회주의 사상단체 북성회(北星會)의 노백용(盧百容) 등이 참석하였다. 형평사 김해분사원들은 자동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 형평사 설립 취지서를 배포하는 한편, 악대를 동원하여 음악을 울리며 축하 분위기를 북돋웠다.

[김해 형평 운동의 전개]

김해 지역민 가운데는 사회적 신분 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형평 운동에 대해 불만을 가진 이가 많았다. 창립 축하식에 참석한 북성회 소속의 강연자가 농민은 백정만도 못하다고 언급하자 방청객들이 강연을 거부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형평 운동을 지원한 김해청년회와 김회교육회까지 규탄받았다. 1923년 8월 14일 흥분한 농민들은 김해청년회와 김해교육회 사무소를 습격하여 집기 등을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었으며, 15일에는 김해청년회와 김해교육회 관계자의 집으로 몰려가 집기를 파손하였다. 16일에는 수천 명의 농민이 형평사 관계자들이 많이 모여 사는 왕릉마을까지 몰려가 집과 기물을 부수었다. 이른바 ‘김해형평사사건’이었다. 김해형평사사건은 김해청년회 간부들의 주민 설득과 김해면장 김경진(金慶鎭) 등의 중재로 주민 대표와 형평사 관계자 간의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일단 해결되었다.

하지만 이후 형평사 김해분사의 활동은 원활하지 못하였다. 1925년 4월에 열린 조선민중운동자대회와 1927년 결성된 재만동포옹호동맹에 참가하는 등의 단편적인 활동 정도가 확인된다. 1929년 5월 김해 읍내 중심지인 북내동에 회관을 건립하였으며, 1930년 8월에는 북내동 신축 회관에서 형평사 김해분사 8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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