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방위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400
한자 國民防衛軍
영어공식명칭 Gungminbangwigun-sageon|Scandal over the National Defence Corp. Officials Budget Embezzl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창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50년 12월 17일연표보기 - 국민방위군 창설
성격 예비군 조직

[정의]

6·25전쟁 시기 「국민방위군설치법」에 의해 경상남도 김해 지역 등에서 동원된 예비군.

[개설]

1950년 11월 압록강 경계선까지 진격하여 북진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말미암아 전세가 역전되고 후퇴를 거듭하였다. 다시 한번 남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이승만 정권은 남쪽 청년들이 공산군의 의용군 및 전쟁 물자 수송 자원으로 동원되는 것을 막고자 1950년 12월 15일 국민방위군 설치 법안을 국회에 상정하였다. 법안은 12월 16일 국회를 통과하였고, 12월 17일 공포되었다. 12월 21일부터 「국민방위군설치법」에 근거하여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장정을 50만 명가량 소집하여 경상도 지역에 설치한 51곳의 교육대로 이동시켰다. 징집된 국민방위군 병사들은 경상도에 설치된 여러 교육대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김해 지역에서는 이송겸을 책임자로 한 제12교육대를 당시 김해읍 봉황동[현 김해시 봉황동] 김해농업고등학교 실습지에 세웠고, 제57교육대는 이준응의 책임하에 진영대흥국민학교에 설치하였다. 처음 수용 인원은 3,000명이었으나, 이후 5,000명으로 늘어났다. 김해교육대에는 대개 밀양, 양산 및 울산 지역에서 징집된 장정들이 유입되었다고 하는데, 집결지 도착 직후에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한 병사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당시 김해부읍장의 말에 따르면 어떤 날에는 하루에 10여 명씩 죽어 나갔다고 한다. 교육대 간부들은 장정들을 서로 뺑뺑이 돌리는 이른바 ‘돌려치기’를 하고, 더 나아가 이들을 마치 수용한 것처럼 서류를 조작하여 예산과 식량을 횡령하였다. 그로 인하여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쓰러진 장정들이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사망한 장정의 수는 5만여 명에 달하였을 것으로 추산된다.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보급품과 식량을 병사들에게 지급하지 않고 착복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여론은 크게 들끓었다. 국회 조사단의 조사 결과가 1951년 4월 26일 국회 본회의에 보고되었고, 1951년 7월 5일 군법회의 재심 공판이 열렸다. 이후 결심 공판과 언도 공판에서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이하 5명이 재판부에 의해 사형이 선고되었고, 1951년 8월 13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총살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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