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보도연맹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418
한자 國民保導聯盟事件
영어공식명칭 Protection and Guidance League Gimhae-gun Branch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창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9년 6월 5일 - 국민보도연맹 결성
전개 시기/일시 1949년 12월 12일연표보기 - 김해군 국민보도연맹 결성
전개 시기/일시 1950년 7월 12일 - 국민보도연맹원 검거

[정의]

1949~1950년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좌익 인물들을 관리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을 조직하고 집단 학살한 사건.

[역사적 배경]

1948년 10월 여순사건 발발을 계기로 이승만 정권은 38도선 이남의 좌익 세력을 근절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을 조직하였다. 1949년 4월경부터 조직 구성 착수에 들어간 국민보도연맹은 오제도 등 사상계 검사들의 기획과 내무부, 국방부, 법무부 등의 당국 동의를 얻어 6월 5일 발족하였다. 국민보도연맹은 일제 강점기 말 준전시 통제 체제가 구축되면서 일제가 공포한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통해 발족하였던 여러 사상 단체의 기능과 성격을 이어받은 조직이었다고 하여도 무방하다. 바꾸어 말하면 국민보도연맹은 해방 공간기 정치 및 사상적 성향이 좌익 계열로 지목된 정당 및 사회단체에서 활동하였던 사람을 중심으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킴으로써 반정부 세력을 미연에 단속, 통제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좌익 계열 인물들을 전향시켜 별도의 반공 전선 전위 조직으로 활용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경과]

1949년 11월 20일 경상남도 국민보도연맹이 출범하였다. 명예 이사장과 이사장은 경남경찰국 간부가 맡았으며, 전향자도 조직의 주요 간부직을 역임하였다. 김해군 출신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지부위원장과 전국인민위원회 경남 대표로 활약한 노백용이 간사장을 맡았다. 1949년 12월 12일에는 김해군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되었다. 일부 전향자들이 김해군 국민보도연맹의 간부진을 맡았으며, 각 읍·면 단위로 지부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주촌면지부는 1950년 1월 29일, 가락면지부는 1950년 2월 3일 결성되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준비위원회에 따르면 김해 지역에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은 대략 993명으로 추산된다. 특기할 점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대다수는 확고하고 투철한 좌파 사상을 지닌 사람들이었기보다는, 해방 직후 아래로부터 분출된 제 요구 사항을 현실화하기 위해 조직된 여러 정당 및 사회단체가 정치적 대세로 부상하게 되자 그에 편승하였던 보통의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결과]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7월 12일 내무부 치안국 중심으로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예비 검속과 검거가 시작되었다. CIC와 우익 단체도 국민보도연맹원과 불순분자에 대한 예비 검속과 검거에 적극 동참하였다. 붙잡힌 사람들은 김해경찰서 유치장 및 무도장, 김해읍사무소 등 관공서로 이송되어 감금되었다. 이들은 요시찰인으로 불리며 1950년 9월까지 군경들에 의해 경상남도 각처로 이송되어 살해당하였다. 또 한편 경찰들은 비상소집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의 명부를 작성하여 그들을 추적, 체포하였고 일부는 처형하였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준비위원회는 학살된 김해 지역 국민보도연맹원이 총 272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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