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537
한자 金海 會峴里 -
영어공식명칭 Hoehyeon-ri Shell Mound in Gimhae
이칭/별칭 김해 패총,김해 회현리 패총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물 산포지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대길 39-32[봉황동 253]
시대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양화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63년 1월 21일연표보기 - 김해 회현리 패총 사적 제2호 지정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2년 -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 부산대학교 고고학과·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 실시[1992]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8년 -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 부산대학교 고고학과·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 실시[1998]
문화재 지정 일시 2000년 2월 5일 - 김해 봉황동 유적 사적 제2호 지정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5년 3월 14일~2005년 6월 13일 -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 삼강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실시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5년 8월 11일~2005년 11월 8일 -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 삼강문화재연구원에서 연장 발굴 조사 실시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김해 봉황동 유적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소재지 김해 봉황동 유적 -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대길 39-32[회현동 253]지도보기
출토 유물 소장처 부산대학교 박물관 -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산대학로63번길[장전동 40]
출토 유물 소장처 국립김해박물관 -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의길 190[구산동 232]지도보기
성격 조개더미
면적 5,098㎡
관리자 김해시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김해 봉황동 유적에 포함]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회현동에 있는 삼한 시대~삼국 시대 조개더미.

[위치]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는 김해시 회현동 253번지, 봉황대 구릉[46.4m] 동남쪽 말단부에 자리한다. 동쪽에 연접한 해반천(海畔川)이 김해 시가지를 관류하여 조만강(潮滿江)에 합류하며, 유적의 북쪽으로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金海 大成洞 古墳群)이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삼한 시대~삼국 시대 형성된 조개더미 유적으로, 1907년(순종 1)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후 1920년~1934년 일본 학자에 의해 여덟 차례 조사되었고, 1992년과 1998년에는 부산대학교 고고학과와 부산대학교 박물관이 발굴 조사하였다. 또한 김해 봉황동 유적(金海 鳳凰洞 遺蹟)김해 회현리 조개더미 내에 패총 전시관을 건립하기에 앞서, 전시관에 설치될 조개더미 토층(土層) 전사(轉寫)와 건물 부지에 대한 고고학적 기록을 위하여 조사가 필요하였다. 이에 삼강문화재연구원에서 2005년 3월 14일~동년 6월 13일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같은 해 8월 11일~그해 11월 8일 연장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퇴적층 내에서 128개 층이 확인되었으며, 생토층(生土層)에서 인공 구덩이[수혈] 2기와 기둥 구멍[주혈]을 발견하였다.

[형태]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의 면적은 5,098㎡이고, 김해 봉황동 유적의 면적은 9만 333㎡이며, 발굴 조사 면적은 59㎡이다. 봉황대 유적과 연결되는 동남쪽으로 뻗어 있는 낮은 구릉[15m]에 형성되어 있는데,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 북쪽 봉황대의 북쪽 기슭에서 조개더미 2개소[봉황대 조개더미 1·봉황대 조개더미 2], 서쪽 경사면에서 조개더미 1개소[봉황대 조개더미 3], 그리고 남쪽 경사면에서 조개더미 1개소[봉황대 조개더미 4] 등 조개더미 4개소가 확인되었다. 이들 조개더미에서 확인되는 패각층은 굴이 대부분이며,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보다 늦은 시기인 2세기~3세기 대의 토기 조각이 확인되어 구릉 일대가 금관가야의 생활 중심지임을 알 수 있다. 또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의 서쪽과 북동쪽에는 토성이 자리한다. 봉황토성은 최근 발굴 조사를 통해 구릉의 북동쪽 비탈 하단부에서 확인되었는데, 2군의 다중 석축 열이 봉황대 구릉의 등고선 방향과 평행하게 형성되어 있다. 토성은 내벽과 외벽 형태의 구조인데, 비교적 지형이 높고 구릉 가까이에 있는 것이 토성의 내벽으로 추정되며, 약 7m 정도 평행하게 진행되는 북쪽이 토성의 외벽으로 추정된다. 확인된 토성의 규모는 너비가 16.5m~22m, 높이가 2.8m이며, 기저부에서 5세기 후반 대의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의 규모는 동-서 길이가 130m, 남-북 길이가 30m, 높이가 7m이며, 평면 형태는 표주박형[瓢形]이다. 발굴 조사에서 확인한 퇴적층의 최대 깊이는 8m이며, 128개의 층을 확인하였다. 층의 구성은 순 패각층보다는 점토와 패각층이 섞인 것이 주를 이룬다. 퇴적층 내에서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모든 층에서 유물을 확인하였다. 또 퇴적층을 제거한 생토면에서 인공 구덩이 2기와 기둥 구멍을 조사하였다. 인공 구덩이의 평면 형태는 부정형이며, 내부에서 민무늬 토기[무문 토기] 아랫부분 조각 1점과 와질(瓦質)과 연질(軟質) 조각이 출토되었다. 기둥 구멍은 89개가 확인되었으나 특별한 정형성을 띠지는 않는다.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는 삼한에서 삼국 시대 초기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상한은 기원전·기원후이며 하한은 4세기이다.

[출토 유물]

유물은 퇴적층 내에서 이미 폐기되어 버려진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것은 거의 없고 조각으로만 남아 있는데, 토기와 토제품, 철기류, 석기류 , 장신구 등 1,770점과 골각기류 930점이 출토되었다. 토기류의 태토는 연질과 와질, 도질(陶質) 계열이며, 기종은 굽다리 접시[고배]와 항아리[호], 옹기[옹], 바리[발], 동이[분], 화로형 토기[노형 토기], 시루[증]가 주종을 이룬다. 또 실생활 토기의 기형을 흉내 내어 소형으로 만들어서 의례용품으로 사용한 의기도 있고, 야요이[미생]계 토기와 송품관과 토제품인 가락바퀴[방추차], 원판형 토제품, 토제 구슬이 소량 출토되었다. 철기류는 손칼[도자]과 쇠 화살촉[철촉], 도끼[철부], 낫[철겸]이 소량의 녹각제 공구 자루와 함께 출토되었고, 석기류는 숯돌[지석], 돌도끼[석부], 갈돌[석봉], 갈판[연석], 돌칼[석도]이 출토되었다. 장신구인 옥과 수정제 구슬도 있었다. 골각기류는 병구(柄具), 손잡이[刀子柄] 뼈 화살촉, 뼈송곳[骨錐], 뼈바늘[骨針], 복골이 출토되었으며, 조개껍데기와 동물 뼈 등의 자연 유물과 쌀, 밀, 팥 등의 탄화된 곡물도 확인하였다. 출토 유물로 보아 조개더미를 만들었던 주체는 철기나 골각기 제작 공방을 운영하였던 집단으로 판단된다.

[현황]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는 1963년 1월 21일 ‘김해 회현리 패총’이라는 명칭으로 사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2000년 2월 5일 김해 회현리 패총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7호였던 봉황대 유적을 통합하여 사적 제2호 김해 봉황동 유적으로 확대·지정하였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는 삭제되었다. 관리자는 김해시이다. 사적지에는 현재 유적 공원인 봉황대공원이 조성되어 김해 시민들이 휴식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남동쪽에는 봉황동유적패총전시관이 있는데, 발굴 조사의 실물 그대로를 전사하여 실제 조개더미의 모습과 퇴적 과정을 볼 수 있는 교육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봉황대 유적 발굴 조사 시 출토된 유물은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고, 패총 전시관 관련 발굴 조사 시 출토된 유물은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2014년 국립김해박물관에서는 1907년~1935년 일본 학자에 의해 여덟 차례 조사된 유구나 유물, 관련 문서 등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의 모든 자료를 수록한 종합 보고서를 간행하였다.

[의의와 평가]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처음 발견된 조개더미로, 남부 지방의 삼한 및 삼국 시대 토기 문화의 지표로서 고고학적 의의가 있다. 발굴 조사된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조개더미의 형성 시기와 퇴적 양상에 관해 명확하게 알 수 있으며, 자연 유물에 대한 자료가 확보됨에 따라 조개더미 형성 당시 주변 환경에 대한 이해가 넓어질 것이다. 더불어 향후 김해 봉황동 유적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상호 관계에 대한 검토를 통해 금관가야 시기의 정치체에 대한 규명과 생활 및 문화상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봉황토성과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가 있는 김해 봉황동 유적의 구릉 동북쪽 경사면에는 주거 시설이 집중 분포하고 있다. 서쪽 구릉으로는 고상 창고가, 구릉 중턱에는 방어 시설인 환호 시설이, 그리고 구릉 남쪽과 북쪽 하단부에는 조개더미가 위치하며, 외곽으로는 일부지만 토성이 자리한다. 봉황대 유적은 가야인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복합 유적으로, 이들의 검토를 통해 금관가야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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