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541
한자 金海 宜祖御書閣
영어공식명칭 Royal Edict Pavilion of king Seonjo, Gomhae
이칭/별칭 선조어서각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흥동로 123-18[흥동 411-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권순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55년연표보기 - 김해 선조어서각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1983년 8월 6일연표보기 - 김해 선조어서각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0호 지정
이전 시기/일시 1989년 - 김해 선조어서각 경상남도 김해시 흥동 411-2로 이건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김해 선조어서각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4년 5월 17일 - 김해 선조어서각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에서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로 변경 지정
현 소재지 김해 선조어서각 - 경상남도 김해시 흥동로 123-18[흥동 411-2]지도보기
성격 어서각
양식 목조 와가|홑처마 맞배지붕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5칸
소유자 안동 권씨 문중
관리자 안동 권씨 문중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흥동에 있는 조선 후기 어서각.

[개설]

김해 선조어서각(金海 宜祖御書閣)임진왜란선조가 왜구의 포로가 된 백성을 구하라고 적은 한글 교서(敎書)를 보관하기 위해 의병 권탁(權卓)[1544~1593]의 후손들이 건립한 건물이다. 임진왜란 초기 왜군은 부산진성(釜山鎭城)과 동래읍성(東萊邑城)을 점령한 다음 내륙으로 확장하여 조선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김해부사는 김해읍성(金海邑城)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의병 권탁김해읍성의 수성장을 자청하여 백성과 의병들을 모아 왜적과 대적하였다. 파죽지세로 조선을 유린하던 왜군은, 관군과 의병이 정비되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세가 밀리자 한반도 남해안까지 후퇴하였다. 조명 연합군과 왜군과의 전황은 교착 국면에 접어들었고, 이 와중에 왜군은 조선의 백성과 전리품을 본국으로 이송하였다. 선조는 조선의 포로들을 구하라는 교서를 백성들이 알기 쉽게 한글로 작성하여 내렸다. 하지만 교서를 받들고 왜적과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남쪽으로 내려갈 신하가 없었다. 이때 김해 지역에서 활약하던 의병 권탁이 자처하여 교서를 받들고 적진으로 들어가, 포로 100여 명을 구출하여 김해읍성으로 돌아왔다. 이 구출 작전 수행 중 권탁은 부상을 입어 1593년(선조 26)에 사망하였다. 1722년(경종 2) 조정은 권탁을 통정대부장례원판결사로 추증하였다.

[위치]

김해 선조어서각김해시 흥동 411-2번지, 임호산(林虎山)과 함박산 중앙의 남쪽 비탈 끝에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김해시 흥동2동 버스정류장과 접해 있어 접근이 쉽다.

[변천]

권탁의 후손들이 마을 근처에 재실을 건립하여 어서[교서]를 보관하고 있다가, 1855년(철종 6) 향인들이 어서각을 건립하여 어서를 보관하였다. 또한 권탁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현충사(顯忠祠)를 건립하여 향사를 제향하였다. 1989년 현재의 자리에 어서각과 현충사를 이건하였는데, 이때 재실인 경충재와 신도비, 그리고 홍살문을 건립하여 현재 모습으로 크게 변모하였다.

[형태]

어서각과 현충사가 남북 축선상에서 남향을 하고 있다. 어서각과 현충사 앞에는 각각 별도의 대문을 두고 담장을 둘러 독립적인 영역을 구획하였다. 어서각은 정면 1칸, 측면 1.5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집이다. 배면에 마루를 두고 정면을 비워 출입 용도로 사용하였다. 기단은 다듬은 장대석을 외벌대로 쌓았으며, 초석은 원형으로 가공한 것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둥근기둥과 네모진 기둥을 혼용하였는데, 가운데 기둥만 네모진 기둥을 사용하였다. 정면에만 2익공(二翼工) 형식으로 장식하였고, 배면에는 익공이 없는 장여 수장으로 간략히 처리하였다. 도리는 둥근 굴도리를 사용하였으며, 상부 가구는 도리가 3개인 3량가이다. 지붕은 한식 기와로 마감하였는데, 막새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단청을 하여 위계를 높였다. 어서각의 정면에는 협문 경첨문(敬瞻門)이 있으며, 규모는 1칸이다. 사당인 현충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집이다. 마루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권탁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현충사 남쪽에는 숭의문(崇義門)을 배치하였는데, 규모는 정면 3칸에 측면 1칸이다.

[현황]

김해 선조어서각은 1983년 8월 6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0호로 지정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는 삭제되었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에서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로 변경되었다. 소유자 및 관리자는 안동 권씨 문중이다. 어서는 1975년 경상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도난당하였는데, 1976년에 되찾아 부산시립박물관에 위탁 보관하였고, 이후 1988년 「선조국문유서(宣祖國文諭書)」라는 명칭으로 보물로 승격 지정되었다. 현재 어서각에는 어서의 복사본이 보관되어 있다. 어서각으로 가기 위해서는 현충사를 거쳐야 하는데, 현충사 서쪽에는 권탁의 묘정비(廟庭碑)가 세워져 있다. 현충사 동쪽에는 재실인 경현재가 건립되어 있으며, 어서각 입구에는 홍살문을 설치하여 성역임을 나타내었다. 홍살문 동쪽에는 권탁의 신도비와 국가유산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며, 서쪽에는 어서각 이건 비석이 있다. 어서각의 뒷산에는 권탁의 묘소가 있다.

[의의와 평가]

김해 지역은 바다와 접한 해안 도시로 일본과 가까우며, 또한 낙동강(洛東江) 수운을 통해 한양으로 갈 수 있는 길목이다. 김해 지역은 예로부터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어서, 조선 시대에는 김해읍성김해 분산성(金海 盆山城)을 수축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 입장에서 김해 지역은 조선 침략의 교두보 확보를 위한 중요한 곳이어서 양국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김해 선조어서각에 보관 중인 어서는 임진왜란 중에 선조가 백성을 구출하기 위해 한글로 작성한 교서로서 선조의 애민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문서이며, 또한 임진왜란 당시의 사회상 연구 및 국문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더불어 어서를 보관하고 있는 김해 선조어서각선조의 교서를 전달하고 포로를 구출한 의병장 권탁의 구국 충정의 정신을 기릴 수 있는 공간으로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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