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6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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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卓 |
영어공식명칭 | Kwon Tak |
이칭/별칭 | 사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강식 |
출생 시기/일시 | 1544년 - 권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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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93년 9월 - 권탁 일본군 포로 구출 |
몰년 시기/일시 | 1593년 - 권탁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22년 - 권탁 통정대부 장례원판결사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855년 - 현충사 건립 |
출생지 | 경상도 선산부 월동리 - 경상북도 구미시 |
활동지 | 김해부 - 경상남도 김해시 |
묘소 | 권탁 묘소 - 경상남도 김해시 흥동로 123-18[흥동 411-2]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정의]
임진왜란 당시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활동한 무신.
[가계]
권탁(權卓)[1544~1593]의 본관은 안동이다. 고려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후예이며, 좌참찬(左參贊) 권의(權宜)의 증손이다. 아버지는 권길원이고, 어머니는 김씨이다.
[활동 사항]
권탁은 경상도 선산부 월동리에서 태어났다. 49세 때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이 치욕을 당하니 신하는 죽어야 하는 날”이라고 말하며 칼을 잡고 일어섰다. 주위 사람들은 일본군이 들어오는 남쪽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으나, 권탁은 홀로 남쪽으로 내려가 동지를 모아 수복을 꾀하였다. 이때 명나라의 원군과 의병의 활동으로 일본군이 남해안으로 후퇴하였다.
일본군은 조선인을 포로로 납치해 가려 하였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에 있는 백성들의 협조가 필요하였다. 포로로 일본군에 협조하던 백성들을 회유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일본군의 근거지에 방문(榜文)을 붙이려 하였다. 이 방문이 현재도 남아 있는 「선조국문유서(宣祖國文喩書)」로, 권탁이 가지고 적진으로 들어갔다. 「선조국문유서」는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쓰였다.
당시 김해성은 일본군에게 함락된 뒤였으며,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 때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이 전사하였다. 이에 김해는 이웃 고을의 수령이 수령을 겸임하였는데, 겸임 수령은 흩어진 병사를 수습하여 일본군에 맞설 방안을 찾고 있었다. 김해에는 일본군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죽도성과 덕진교성[신답왜성]을 쌓고, 6,000여 명의 군사로 주둔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권탁이 스스로 수성장이 되기를 청하였다. 권탁은 포로의 가족처럼 꾸미고, 밤중에 일본군 진지로 잠입하였다. 수풀 속에 숨어서 새벽까지 기다리자, 조선 백성 수십 명이 땔감을 하러 나왔다.
다음날 낙동강 어귀에 배를 대고, 장사 수십 명을 수풀 더미에 숨겨둔 채 일본군과 백성을 기다렸다. 2경[밤 9시~11시]이 되자 포로를 포승줄로 엮어 앞세우고 칼을 찬 일본군이 뒤따라왔다. 권탁은 일본군에게 술을 먹이며 시기를 보다가 40여 명의 목을 베었다. 권탁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100여 명의 백성을 구출하여 돌아왔다. 그러나 전투 중에 입은 부상으로 김해성으로 돌아온 후 죽었다.
[묘소]
권탁의 무덤은 경상남도 김해시 흥동에 있는 현충사(顯忠祠) 뒤편에 있다.
[상훈과 추모]
권탁은 1722년 증손 권재도(權載道)의 상소로 통정대부 장례원판결사에 추증되었다. 1836년에는 권탁의 후손들이 「선조국문유서」를 보관하기 위해 선조어서각을 건립하였고, 1855년에는 김해 유림이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흥동 임호산 아래에 권탁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현충사를 세웠다. 선조어서각은 1989년 4월 현충사 뒤편으로 이전하여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