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5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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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海 盆山城 |
영어공식명칭 | Gimhae Bun-Mountain Fortress |
이칭/별칭 | 북산석성(北山石城),타고봉산성(打鼓峯山城),타고성(打鼓城),분산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사충단길 190[어방동 산9]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안성현 |
폐지 시기/일시 | 1530년 무렵 - 김해 분산성 폐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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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1871년 - 김해 분산성 개축 |
문화재 지정 일시 | 1963년 1월 21일 - 김해 분산성 사적 제66호 지정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8년 - 김해 분산성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 조사 실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김해 분산성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
소재지 | 김해 분산성 - 경상남도 김해시 사충단길 190[어방동 산9] |
성격 | 관방 유적|산성 |
지정 면적 | 양식: 퇴뫼식 석축 산성|크기(높이, 길이, 둘레): 900m[길이] |
소유자 | 김해시 등 |
관리자 | 김해시 |
문화재 지정 번호 | 사적 |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어방동 분산에 있는 신라 시대~조선 시대 퇴뫼식 석축 산성.
[개설]
김해 분산성(金海 盆山城)에 대한 학술 조사는 1998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의 『문화유적분포지도』 제작을 위한 지표 조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김해시는 분산성 복원 사업 일환으로 총 여덟 차례의 시굴·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성벽과 성문, 성 내부의 대체적인 구조를 밝혀 냈는데, 현재까지의 조사만으로는 시기별 경관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김해 분산성을 북산석성(北山石城), 타고봉산성(打鼓峯山城), 타고성(打鼓城)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건립 경위]
김해 분산성은 삼국 시대 신라가 백제의 침입으로부터 김해 지역을 지켜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축조하였다.
[변천]
성벽은 고려 말과 조선 후기, 두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졌다. 고려 말은 박위(朴葳)에 의한 개축이었다. 분산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정몽주(鄭夢周)의 「김해산성기(金海山城記)」에 나와 있는데, “박위가 김해부사로 부임하여 분산성을 수리하여 확장하되 돌로 쌓아 견고하게 하고, 산에 의지하여 높게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경상남도지리지(慶尙南道地理志)』[1425]부터 『경상남도김해군읍지(慶尙南道金海郡邑誌)』[1899]까지 나타난다. 그중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과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1656], 『여지도서(輿地圖書)』[1757~1765]의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기술된 내용이 있는데, 산성의 명칭은 ‘분산성’이라 하였고, 석축의 둘레는 1,560척[472.73m]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1872년(고종 9) 「분산산성지도(盆山山城地圖)」에는 성벽을 비롯해 진아(鎭衙), 군기창(軍器廠) 등이 그려져 있다. 문헌 기록을 참고하면, 김해 분산성은 고려 시대 후기 이전에 축성되었으며, 1530년(중종 25) 무렵에 폐성되었다. 이후 1871년(고종 8)에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져서 조선 시대 후기까지 존폐를 거듭하며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치]
김해 분산성은 김해시 어방동 산9번지 일원에 있다. 김해 시가지 북동쪽에 우뚝 솟아 있는 분산(盆山)[330m]의 정상부를 두른 퇴뫼식 석축 산성으로, 고 김해만(古金海灣)과 김해평야(金海平野)가 한눈에 조망된다. 평면 형태는 남북으로 긴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길이는 900m 정도이다.
[형태]
북문 터 주변의 초축 성벽은 잘 다듬은 장방형과 방형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바른 층 쌓기를 하였고, 벽석 사이의 빈틈에는 잔돌을 끼워 견고성을 높였다. 외벽 기저부를 보강하기 위한 시설로 기단 보축(補築)을 설치하였다. 보축은 외벽에 사용한 석재보다 다듬지 않은 할석을 이용하여 바깥으로 면을 맞추었으며, 외부는 사질 점토를 다져서 보강하였다. 동문 터는 두 차례 조사하였는데, 그 결과 초축 성벽과 2개 시기의 성문 및 성벽, 그리고 외부에서 성문과 관련한 석축 3개소가 확인되었다. 초축 성벽은 해발 278.3m 정도에서 확인되었다. 외벽은 가로 55㎝, 세로 20㎝의 장방형 할석으로 바른 층 쌓기를 하였으며, 면석 사이의 빈틈에 쐐기돌을 끼워 견고성을 높였다. 외벽 기저부에는 북문 터 주변에서 확인된 보강 시설을 설치하였다.
성문은 초축 성벽과는 상당한 시차가 있는데, 1차 성문은 여말 선초, 2차 성문은 조선 시대 후기에 해당한다. 2차 성문은 1차 성문을 부분적으로 개보수하여 활용하였으므로 평면 구조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1차 성문이 위치하는 곳은 급경사를 이룰 뿐 아니라 자연 암반이 드러나 있어 성벽 축조에 있어 열악한 지형인데, 이를 극복하고자 3단의 축대를 설치하여 성벽의 붕괴를 방지하였다. 문 터의 평면 형태는 남쪽 측벽과 옹성 형태의 북쪽 측벽 끝부분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남쪽을 향해 개구(開口)되어 있으며, 옹성부로 들어오는 통로부 입구의 너비는 220㎝로 협소하다. 바닥면에는 각 단마다 2매 정도의 대형 석재를 이용하여 3단으로 약간의 단차를 두어 시설하였으며, 그 위로 260㎝의 통로 너비를 확보하여 양 측벽을 축조하였다.
동문 터 주변의 외벽은 초축 성벽을 정리한 후 내벽 쪽으로 약 80㎝ 정도 들여서 축조하였는데, 기저부는 적갈색 점토를 이용하여 약 30㎝ 높이로 다져서 조성하였다. 성벽은 첫째, 평균 가로 120㎝, 세로 60㎝ 크기의 대석을 이용하여 허튼층쌓기를 하였고, 둘째, 면석 사이의 공간에 쐐기돌을 사용하였으며, 셋째, 상단과 하단이 비교적 견고하게 맞물려 있는 등 크게 세 가지 특징이 관찰된다. 내벽은 할석 기초 위에 가로 100㎝, 세로 50㎝ 규모의 큰 성석을 이용하여 기저부를 조성하였으며, 그 상부는 가로 60㎝, 세로 20㎝의 비교적 작은 크기의 장방형 석재를 이용하여 허튼층쌓기를 하였다.
성문 외부에는 지형을 극복하기 위해 3개소의 축대를 설치하였는데, 순서대로 번호를 부여하였다. 축대 1은 초축 체성 남쪽의 자연 암반에서 북쪽의 자연 암반까지 설치되었으며, 초축 성벽의 진행 방향과 평행하게 성 내측으로 만곡한다. 초축 성벽에서 성 외측으로 최대 470㎝ 정도 간격이 있으며, 평균 가로 50㎝, 세로 20㎝ 크기의 석재로 허튼층쌓기를 하였다. 축대 2는 축대 1의 적심 상단에서 성 내측으로 최대 160㎝가량 들여서 어느 정도 면을 맞추어서 쌓아 올렸다. 가로 40㎝, 세로 20㎝ 크기의 석재로 허튼층쌓기를 하였으며, 잔존 높이는 2단~7단, 20㎝~120㎝ 정도이다. 축대 3은 대체적으로 축대 2의 적심 상단에서 약 150㎝ 들여서 축조하였다. 조선 후기에 보수의 흔적이 확인된다.
2차 문 터의 통로부는 확석을 기준으로 내부와 외부가 구분되는데, 성문의 내측 벽에 길이 약 260㎝의 석축을 덧대어 쌓아 내옹성을 설치하였다. 성문 외측 문 터 입구에서 성내로 향하는 통로부는 점차 좁아지다가 문 터 확석을 기준으로 성문 측벽이 다시 넓어지는 구조이다. 통로부를 기준으로 동문 터 북쪽 성벽의 내벽과 외벽 간 너비는 1,010㎝이고, 남쪽 성벽의 내벽과 외벽 간 너비는 680㎝ 정도로 북쪽 성벽이 더 두껍다.
또 「분산산성지도」에서 보이는 진아 터와 추정 군기고 터, 집수지 6기를 조사하였는데, 집수지는 평면 원형과 방형, 장방형으로 나누어진다. 초축 시기와 관련이 있는 원형 집수지는 평면이 원형의 계단식으로, 6세기 대부터 통일신라 시대까지 축조된 신라 집수지와 유사하다. 유물은 조각들이 대부분이어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특히 초기 철기 시대~삼국 시대의 유구에서 출토된 유물이 성 내부에서도 채집되었는데, 이를 통해 산성이 축조되기 이전 분산 정상과 비탈면에서 인간이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유물로 축조 시기를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짧은 다리 굽다리 접시[단각 고배] 중 이른 시기의 것이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7세기 중반경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또 성 내부 진아 터에서는 분청사기 조각과 백자 조각, 물미, 불명 철기 등이 수습되어, 조선 전기부터 조선 시대 후기까지 존속되었음이 밝혀졌다.
[현황]
김해 분산성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66호로 지정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는 삭제되었다. 소유자는 김해시 등이고, 관리자는 김해시이다. 성벽은 상당 부분 복원이 진행되었다. 성 내부의 분산봉수 역시 복원이 완료된 상태이며, 흥선대원군의 만장대(萬丈臺) 친필 휘호 및 충의각(忠義閣), 해은사(海恩寺)가 자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김해 분산성은 7세기 중반, 대백제전 대비와 김해 지역의 안정적인 지배를 위해 신라가 축성하였다. 통일신라 시대까지 치소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으나, 김해 고읍성(金海 古邑城)이 축조되면서 배후 산성으로 성격이 변하였다. 따라서 김해 분산성은 삼국 시대 치소의 변천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다만, 성 내부의 조사가 이루어지기는 하였으나 변천을 논의하기에는 부족하므로 종합 정비 계획에 따른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