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5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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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海 古邑城 - |
영어공식명칭 | Gimhae Goeupseong Fortress |
이칭/별칭 | 고읍성 터,김해 고읍성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 129|대성동|동상동|서상동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안성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7년~2020년 - 김해 고읍성 터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경남문화재연구원·한국문화재재단에서 발굴 조사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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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김해 고읍성 터 -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 129 |대성동|동상동|서상동 |
출토 유물 소장처 | 국립김해박물관 -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의길 190[구산동 232] |
성격 | 읍성 터 |
[정의]
통일 신라 후기에 축조된,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대성동·동상동·서상동에 걸쳐 있는 읍성 터.
[개설]
김해 고읍성(金海 古邑城)은 통일 신라 시대부터 김해읍성(金海邑城)이 축조되기 전까지 김해 지역의 군사적·행정적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토성이다. 구 김해 시가지를 둘렀던 평산성-포곡식-이며, ‘기단 석축형 판축 토성(基壇 石築型 版築 土城)[성벽 가장 아래쪽에 돌을 놓고 그 위로 판축 성벽을 쌓은 형태]’이다.
[변천]
김해 고읍성은 통일 신라 후기에 초축된 이후 조선 전기까지 치소로 활용하였다. 처음 쌓은 시기에 대해서는 통일 신라 시대 후기 설과 고려 시대 초기 설로 나누어진다. 고려 시대로 보는 설은 성벽 축조에 사용된 나무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값[955~1225]을 근거로 들고 있다. 하지만,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토기와 기와, 성벽의 축조 수법 등을 고려할 때 통일 신라 후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 시대에 제작된 고지도 「김해부해동지도(金海府海東地圖)」와 「김해부내지도(金海府內地圖)」에서 “김해 고읍성은 조선 시대 전기에 축조된 읍성의 외부를 마치 외성(外城)처럼 둘러싸고 있다”고 하였으며, 각각 ‘수로왕시이축토성(首露王時而築土城)’과 ‘토성(土城)’으로 명기하고 있다. 조선 시대 기록에는 “박위(朴葳)가 고산성을 고쳐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박위가 수축(修築)한 성곽은 김해 분산성(金海 盆山城)을 지칭한 것이므로 김해 고읍성과는 관계가 없다. 성벽은 최소 한 차례 이상의 수축이 이루어졌으며, 수축을 하면서 폭이 좁아졌다. 초축 성벽의 중단 또는 상단이나 외부에 새롭게 기단 석축을 설치한 후 성벽을 쌓는 방식으로 수축하였다. 성 내부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지 않아 정확한 변천은 알 수 없다.
[위치]
김해 고읍성 터는 김해시 봉황동 129번지와 대성동, 동상동, 서상동에 걸쳐 있다. 구 김해 시가지를 말각 방형으로 둘러싼 형태로, 성 내부에 김해 대성동 고분군(金海 大成洞 古墳群)과 봉황대, 김해 수로왕릉(金海 首露王陵)이 위치한다. 북동쪽 배후의 분산에는 김해 분산성이 있다. 규모는 5,400m 정도로 알려져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2017년~2020년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과 경남문화재연구원, 한국문화재재단 등 여러 기관에 의해 조사가 이루어졌다. 성벽을 주로 조사하였는데, 김해시의 도시화로 인해 성벽의 정확한 진행 방향을 알 수 없으므로 학술 조사보다는 구제 발굴 위주로 진행하였다. 조사 결과 성벽은 기단 석축형 판축 토성임이 밝혀졌으며, 최소 한 차례 수축이 이루어졌다. 규모는 너비가 최소 950㎝이며, 영정주(永定柱)의 간격은 450㎝~500㎝, 수축 성벽의 너비는 900㎝~950㎝이다. 처음으로 축조한 성벽에서는 다양한 축조 수법이 확인된다. 성벽의 건설은 기저부 조성→기단 석축 및 기단토 축조→성벽 축조 순으로 이루어졌다. 남서 벽의 조사 보고서에서는 성벽의 내외부를 흙으로 보강하였다고 하였으나, 다른 곳의 성벽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기저부는 축조 이전 문화층을 정지한 후 계단식으로 석축을 쌓고, 그 사이에 흙을 동시에 쌓았다.
성벽의 판축부에서는 두 가지 축성술이 확인된다. 북동 벽은 흙으로 층층이 다졌으나 성벽 진행 방향으로 아치상을 이룬다. 한 구간의 너비는 450㎝~500㎝ 간격으로 배치된 영정주보다 넓다. 이곳을 제외하고는 내벽과 외벽에 영정주를 세운 후 내벽·외벽 및 성벽과 직교하는 판재(版材)를 사용하여 층층이 판축하였다. 외벽의 기단 석축 외부는 흙을 다져서 성벽을 보강하였다. 다만, 성벽 진행 방향에서 영정주를 중심으로 판축토가 단절되는 것이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성벽의 축조 구간에 따라 한 구간의 길이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최근 조사된 남서 벽은 선대 유구를 단면 ‘L’ 자형으로 굴착한 후 기단 석축을 설치하였고, 그 상부에 판축 토성을 축조하였다. 성벽 외부에서는 너비 350㎝ 정도의 기와층이 확인되었는데, 성 외부로 경사를 이룬다. 기와층에 대해서는 기와를 깔았다는 주장과 상부의 와적 여장(女牆)이 무너진 것으로 보는 견해로 나누어진다.
유물은 토기류와 기와류, 자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이 중 토기류는 5세기~7세기에 해당하므로 토성과는 관련이 없다. 기와류는 통일신라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성서면속와(城西面屬瓦)’, ‘성자초(城子草)’, ‘전맹(全孟)’, ‘칠진영만(七珍盈滿)’ 등의 명문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이 중 ‘성서면속와’ 명문 기와가 토성의 서쪽 성벽에서 출토된 것은 ‘토성의 서벽에 이은 기와’로 해석할 수 있다.
[현황]
조선 시대 후기까지 성벽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나, 현재는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훼손되어 원형을 찾을 수 없다. 출토 유물은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소장하여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김해 고읍성은 통일 신라 시대에 축조된 이후 김해읍성이 축조되기 이전까지 김해 지역의 치소성으로 활용되었다. 성벽은 기단 석축형 판축 토성이지만 쌓는 방법은 구간별로 차이가 있다. 통일 신라 시대, 고려 시대 치소의 변화와 이 시기 축성법 및 변천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는 유적이다. 다만, 토성과 관련한 부속 시설이 확인되지 않아 정확한 변천을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종합 정비 계획을 수립한 후 성벽과 성 내부에 대한 학술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