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4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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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城郭 |
영어공식명칭 | SungKwa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안성현 |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흙이나 돌·나무로 쌓은 삼국 시대~조선 시대의 방어 시설.
[개설]
성곽(城郭)이란 ‘내성(內城)’과 ‘외곽(外郭)’의 합성어인데, 여기서 ‘곽(郭)’은 내성 주위에 설치된 외성(外城)·나성(羅城)·나곽(羅郭) 등을 지칭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성곽은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축성되었는데, 산지가 많은 지형적인 요인으로 인해 산성이 다수를 차지한다.
성곽은 목적과 기능, 위치, 축조 재료로 구분할 수 있다. 기능상으로는 도성과 행재성(行在城), 읍성, 유사시를 대비한 산성(山城)과 보루(堡壘), 영진(營鎭)과 수보(戍堡), 행성(行城)과 방장(防牆), 창성(倉城), 봉수(烽燧)로 구분된다. 위치는 산성과 평지성, 평산성으로 나누어진다. 산성은 조선 시대 후기 정약용(丁若鏞)과 신관호(申觀浩)에 의한 분류안으로, 고노봉(栲栳峯)·산봉(蒜峯)·사모봉(紗帽峯)·마안봉(馬鞍峯) 등 네 가지로 분류되었는데, 그중 사방이 높고 중앙부가 낮은 지형인 고노봉을 최고로 뽑았다. 이를 다시 퇴뫼식과 포곡식, 복합식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퇴뫼식은 산의 봉우리를 중심으로 비탈부를 따라 성벽을 쌓은 형식이다. 포곡식은 봉우리와 계곡을 두르는 것으로, 규모가 크고 수원(水原)을 확보하기 유리하다. 복합식은 퇴뫼식과 포곡식이 결합된 형태로 규모가 매우 크다. 평지성은 삼국 시대 초기와 통일신라 시대 이후 평지에 토성으로 축조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돌로 쌓은 읍성이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토성의 외부에는 강이나 하천을 이용하여 자연 해자(垓子)를 두거나 인공적인 해자를 설치하였다.
성벽의 축조 재료에 따른 분류는 목책성(木柵城)과 토성(土城), 석축성(石築城), 토석 혼축성(土石 混築城), 전축성(塼築城)으로 나누어진다. 이 중 토석 혼축성은 개성 나성에서 확인된 사례가 있으나 대부분 토성에서 석성(石城)으로 개축된 성벽에서 확인된다. 목책성은 통나무 등을 엮어서 만든 방어 시설물 내지 구획 시설의 일종인데, 재질이 나무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보존되지 못하여 오늘날 목책의 완형을 알기는 힘들다. 유성룡(柳成龍)의 『설책지법(設柵之法)』에서는 목책의 설치 방법과 효용성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 목책성은 청동기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사용되었다. 조선 시대의 목책은 임진왜란 시 축조한 진양군 진성면 월아산(月牙山)의 목책성이 유명하며, 행궁(行營) 시 간단하게 설치되기도 하였다.
토성은 흙을 주 재료로 하여 축조한 성곽을 지칭하는데, 석성과 함께 우리나라 성곽의 주종을 이룬다. 목책성에 비하여 공력이 많이 들지만, 석성보다는 공력이 적게 들 뿐 아니라 재료인 흙을 축성 지역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축성되었다. 성벽을 축조하는 방법에 따라 삭토법(削土法), 성토법(盛土法), 판축법(版築法), 보축법(補築法) 등이 있다. 삭토법은 지세를 이용하여 기존의 지형을 성벽이 될 만큼 적당한 폭을 남겨 두고 안팎을 적절하게 깎아 내어 그 흙으로 외고 내저(外高 內底)의 성벽을 만드는 방식으로, 단시일 내에 손쉬운 방법으로 축조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안팎의 도랑은 방어와 배수로의 역할을 하는데, 각각 내황(內隍)과 외황(外隍)이라고 불린다. 성토법은 성벽부의 흙을 순서 없이 무작위로 쌓아 올린 후 마감 높이에서 두들겨 일정한 형태의 성벽을 만드는 방법이다. 흙을 일정한 두께로 의도적으로 펴서 축조하는 판축법과 비교되는데, 우리나라 산성의 토축(土築) 대부분이 성토법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판축법은 현재 발굴 조사하는 대부분의 토성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토성 축조에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공법(公法)은 중국의 신석기 시대(新石器 時代)에 해당하는 용산기(龍山期)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며, 판축 공법(版築 公法)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시기는 삼국 시대로서 우리나라 토성을 축조하는 데 가장 일반적으로 활용되었다. 판축 토성은 성벽 진행 방향으로 나무 기둥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운 후, 기둥 사이를 얇은 나무로 고정하였다. 내벽과 외벽에 판재를 설치한 후 내부는 흙으로 다져서 만들었다.
석성은 돌로 쌓은 성벽을 말한다. 토성에 비하여 많은 공력이 소요되지만, 일단 축조가 끝나면 방어력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유지 관리에도 편리한 장점을 가지므로 삼국 시대에서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축조되었다. 석성은 시기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확인된다.
성곽은 기본적으로 성문과 성벽으로 나누어진다. 성문은 개거식(開据式)[성문 입구 상부가 개방된 형태]과 평거식(平据式)[성문 양쪽에 측벽을 쌓고 측벽 위에 장대석 등을 얹은 형태], 홍예식(虹霓式)[성문의 천장을 무지개 모양으로 만든 형태], 현문식(懸門式)[성벽의 일정 높이에 사다리를 놓고 다니는 형태] 등이 있다. 한편, 성문 방어를 위해 ‘U’ 자형의 옹성(甕城)을 두르거나, 성문 양쪽으로 돌출시켜 적대(敵臺)를 배치하기도 하였다. 또 적으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해 낮게 쌓은 담장인 성가퀴나 성벽의 일부 구간을 돌출시킨 치(雉)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김해 지역의 성곽]
김해 지역은 낙동강이 남해로 유입되는 지점에 위치하므로, 대륙에서 남하하는 북방계 문화의 종착지임과 동시에 해양 루트를 통해 들어오는 남방계 문화의 상륙 지점이기도 한 관문에 해당한다. 금관가야는 이러한 지정학적 이점으로 일찍이 전기 가야(前期 伽倻)의 맹주국으로 발전하였다. 이후 금관가야가 신라에 투항함으로써 김해 지역은 신라가 낙동강 서안으로 진출하게 된 최초의 지역이 되었다. 또한 신라는 김해 지역을 발판 삼아 서진을 시작하였다. 삼국이 통일된 이후에도 김해 지역의 관문적 성격으로 인해 조선 시대까지 지속적인 축성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김해 지역의 성곽을 금관가야, 신라 및 통일신라, 고려, 조선 시대로 나누어서 기술하는 것이 타당하지만, 현재까지의 자료로는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어렵다.
금관가야의 성곽은 봉황토성과 김해 나전리 토루(金海 羅田里 土樓), 신기산성 목책성이다. 이들 성곽의 배치로 보아 봉황토성을 중심으로 김해 지역을 아우르는 방어 체계가 구축되었으며,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보다 많은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금관가야의 성벽은 목책이나 토성인데, 이 중 후자는 판축으로 축조되었다는 점에서 유사한 시기에 성토 기법으로 축성된 합천 성산토성(陜川 城山土城)[경상남도 기념물]과 차이가 있다. 이와 달리 판축 토성으로 축조된 아라가야 왕성과도 다른 축조 수법이 적용되었다. 또한, 금관가야는 신라에 복속되는 시점까지 석축 성벽을 축조할 수 있는 기술력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신라 성곽은 김해 양동산성(金海 良洞山城)[경상남도 기념물]과 신기산성 석축성, 김해 분산성(金海 盆山城)[사적], 김해 마현산성(金海 馬峴山城)[경상남도 기념물] 등이며, 서진을 위한 것과 김해 지역을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축성으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김해 양동산성과 신기산성 석축성이다. 김해 양동산성은 칠원 무릉산성-함안 성점산성(咸安 城岾山城)[경상남도 기념물], 문암산성Ⅱ와 함께 서진의 방향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신기산성은 신라가 낙동강 서안으로 진출한 후 안정적인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축조하였다. 후자는 김해 분산성과 김해 마현산성이며, 김해 분산성은 축조된 이후 김해 지역의 치소로 사용되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김해 고읍성(金海 古邑城)과 송정리 토성이 축조되었다. 이 중 김해 고읍성은 김해 지역의 치소성이며, 김해 분산성은 배후 산성으로 기능이 변하게 되었다. 송정리 토성 역시 김해 고읍성과 유사한 기능으로 축조된 것으로 보이지만, 복합성의 평산성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잘 확인되지 않는 형태이다. 이후 조선 시대에는 김해 고읍성이 폐기된 후 1434년(세종 16) 김해읍성(金海邑城)이 축조되었으며, 읍성이 폐기되는 1895년(고종 32)까지 치소로 활용되었다.
[의의와 평가]
김해 지역은 대륙에서 남하는 북방계 문화의 종착지임과 동시에 해양 루트를 통해 들어오는 남방계 문화의 상륙 지점이기도 한 관문에 해당하므로, 교통상·국방상의 요충지이다. 따라서 금관가야 때부터 조선 시대까지 다양한 형태의 성곽이 축조되었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김해 분산성과 김해 양동산성, 김해읍성에 대한 복원은 물론, 이외의 성곽에 대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