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642
한자 金舒玄
이칭/별칭 김소연(金逍衍),김서운(金庶云)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
집필자 조원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부임|활동지 만노군 - 충청북도 진천군
부임|활동지 대량주 - 경상남도 합천군
사당|배향지 취산재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로 204[지산리 507-2]
성격 무신
성별
본관 김해
대표 관직 대야성군주

[정의]

삼국 시대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있었던 가락국 왕실의 후손이자 신라의 장군.

[가계]

김서현(金舒玄)은 문무왕의 명으로 김유신 사후에 건립된 김유신비에 ‘김소연(金逍衍)’으로 표기되어 있었다고 하며,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서운(庶云) 잡간(迊干)’으로 나온다. 532년(법흥왕 19) 신라로 투항한 가락국[일명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김구해]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김무력이고, 아들은 김유신이다.

김서현은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아들 숙흘종(肅訖宗)의 딸인 만명(萬明)과 야합하였다. 뒤에 김서현이 만노군태수(萬弩郡太守)가 되어 만명과 함께 가려고 하자, 숙흘종은 딸을 집에 가두고 지키도록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벼락이 집의 문간을 쳐서 집안이 혼란하여졌다. 만명은 그 틈에 김서현과 만노군으로 갔고, 김유신을 낳았다.

당시 신라 왕족들은 신성한 혈통을 지키기 위해 고모·이모나 사촌 자매간에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만명이 김서현과 결혼하려고 하자, 숙흘종도 이 때문에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두 사람의 혼인은 신라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설화로까지 남게 되었다. 양가의 결합은 가야계인 김유신을 신라 지배층 내에 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활동 사항]

김서현의 할아버지인 구형왕은 신라에 항복하면서 상등의 벼슬을 제수받고, 본국을 식읍으로 받았다. 아들인 김무력과 손자인 김서현도 그 식읍을 유지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김서현김유신은 김해 지역의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자신의 기반을 다지고, 가문의 무력을 지탱하는 기반으로 활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서현이 김해 지역의 제반 기반을 어떻게 운영하였는지는 문헌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 김서현의 행적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도 별도의 열전이 마련되어 있지 않고, 아들인 김유신 전에 간단하게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김서현은 충청북도 진천으로 추정되는 만노군태수를 지냈다. 629년(진평왕 51) 8월에 대장군 김용춘(金龍春)과 함께 김유신을 부장군(副將軍)으로 삼아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에서는 김서현이 소판(蘇判)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 안무대량주제군사(安撫大梁州諸軍事)에 임명되었다고 하고, 또 양주총관(良州摠管)이 되어 백제의 예봉을 꺾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직명은 다분히 후대적인 표현이다. 김서현이 살던 당시에는 총관이나 도독이란 용어 대신 군주(軍主)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또한 양주(良州)도 설치되기 전이었다. 김서현의 생존 당시 직명은 대야성군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훈과 추모]

김서현 부부의 진영을 경상남도 양산시 취산재에서 모시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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