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675
한자 宋賓
영어공식명칭 Song Bin
이칭/별칭 사신(士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강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42년연표보기 - 송빈 출생
몰년 시기/일시 1592년 4월 20일연표보기 - 송빈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00년 - 송빈 공조참의 추증
추모 시기/일시 1708년 - 송빈 표충사 배향
추모 시기/일시 1784년 - 송빈 송담사 배향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68년 - 삼충실기 간행
추모 시기/일시 1875년 - 송빈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 오위도총부도총관 추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0년 - 사충실기 간행
출생지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하계리 지도보기
활동지 웅천읍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활동지 김해부 - 경상남도 김해시
성격 의병
성별

[정의]

임진왜란 당시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의병.

[가계]

송빈(宋賓)[1542~1592]의 본관은 청주이고, 자는 사신(士信)이다. 사성(司成)을 지낸 5대조 송승은(宋承殷) 때 김해로 이주하였다. 고조할아버지는 참군 송숙형(宋淑亨), 증조할아버지는 생원 송유선(宋由善), 할아버지는 절제사 송경(宋經)이다. 아버지는 절제사 송창(宋昌)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태석(金泰碩)의 딸 분성 김씨이다. 부인은 안동 권씨 권윤(權崙)의 딸로, 2남 2녀를 낳았다.

[활동 사항]

송빈은 1542년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하계리에서 태어났다. 향시에 5번 합격하였지만, 예부의 복시(覆試)에서 떨어졌다. 이후 과거를 그만두고 학문과 행실을 수양하였다. 성품이 강개하여 절의를 지녔다고 한다. 웅천 수령과 친분이 있어서 찾아간 적이 있는데, 그때 왜구가 쳐들어오자 성문을 열어 놓고 동요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여 적이 물러가게 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해부사 서예원(徐禮元)이 송빈의 명망을 듣고 일을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송빈은 팔성사에서 아들에게 “나는 충성하고 너는 효도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라고 하고 성으로 들어갔다. 서예원은 송빈에게 중군(中軍)을 맡겼다. 송빈은 장졸들에게 “국가를 위하여 한 번 죽는 것은 신자(臣子)의 분수이다”라고 하자, 장졸들이 따르겠다고 하였다. 송빈은 친구 이대형 등을 발탁하여 성문을 지키게 하고, 이인지(李麟趾)에게 군량을 조달하게 하였다. 왜군이 성을 포위하자, 밤에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적의 수급을 베었다. 적이 도망치자 죽도[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까지 추격하였다. 그러나 적선이 대규모로 밀려오자 성으로 들어왔는데, 이때 서예원이 북문을 열고 도망치려고 하였다. 이에 “성주께서 위급한 때에 나라의 은총에 보답하지 않고 도망한다면 부끄럽지 않겠는가”라고 하여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1592년 4월 19일 밤에 적이 들녘의 보리를 베어 성 아래 참호를 메우고 쳐들어오자 성은 함락되었다. 이때 서예원은 북문으로 도망갔으나, 송빈은 사졸들을 격려하며 끝까지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부하 양업손(粱業孫)이 살아 나와 참상을 전하여 송빈의 순절이 알려졌다.

[상훈과 추모]

송빈은 1600년 공조참의에 추증되었고, 1875년에는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추증되었다. 1708년 부사 이봉상(李鳳祥)이 송빈의 사적을 보고 사림에게 사우를 건립하고 제향하도록 하여 가곡[현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에 표충사가 세워졌다. 1784년에는 김득기, 이대형과 함께 송담서원(松潭書院)에 배향되었고, 1871년에는 사충단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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