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3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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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兵 |
영어공식명칭 | The Righteous Army |
이칭/별칭 | 의병운동,향병,충의군,근왕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강식 |
[정의]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 김해 지역에서 활동했던 일반 백성으로 구성된 비정규 군대.
[개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성리학을 이념으로 한 조선에서는 8도에서 수많은 백성이 의병에 참여하였다. 오랫동안 해당 지역에서 살아온 의병은 양반층인 재지사족(在地士族)과 하층민이 결합하여 단기간에 조직될 수 있었다. 비정규군이었던 의병은 지형을 이용한 매복이나 기습 작전으로 일본군을 공격하여 많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의병의 활약으로 일본군은 진격 속도가 늦어졌으며, 군량이나 무기 등의 군수 보급이 끊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아울러 의병이 활약하자 관군도 전열을 정비하여 일본군에 대응할 수 있게 되었으며, 명에서 보낸 원군과 함께 전세를 바꾸어 나갔다. 특히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의 서쪽 진로에 위치한 김해는 바로 군사적 대응을 직접 해야 하는 지역이었으며, 동래 다음으로 일찍 일본군이 진입한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임진왜란 동안 일본군은 김해를 교두보로서 확보하고 장기간 주둔하였으며, 김해는 일본군의 약탈과 지배를 당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김해 지역의 특수한 지리적 조건은 일찍부터 의병이 활약하게 만들었는데, 김해성 전투에 직접 참전해 순국한 사충신을 비롯한 의병의 죽음이 이를 증명한다. 아울러 김해성 전투 이후 각지로 흩어진 의병은 다른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나는 데에 선도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김해 의병의 활약으로 임진왜란 이후 다수의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배출되었으며, 김해 지역 의병의 활동은 사우(祠宇)의 건립과 실기(實記)의 편찬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기려지고 전해져 내려왔다.
[사충신의 의병 활동]
임진왜란 초기부터 김해에서 의병이 창의하여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김일손(金馹孫), 조식(曺植) 등이 거주하면서 성리학적 기반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해에서 일찍부터 전개된 의병 활동은 김해성 전투에 참전하여 순절한 사충신(四忠臣)이 대표적이었다. 사충신의 의병 활동은 『사충실기(四忠實記)』에 상세하게 정리되어 전해온다.
송빈(宋賓)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해부사 서예원(徐禮元)이 일본군의 침략 문제를 함께 의논하기를 청하였던 인물이었다. 나이 50세였지만, “내가 비록 벼슬 없는 선비지만 평생의 뜻은 오직 나라를 위하는 일 뿐이다. 이제 나는 부사와 더불어 생사를 같이 할 것이다. 너는 집에 돌아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아우와 함께 집안일을 잇는 것이 효도가 되는 것이다” 하며, 장남에게 집안을 부탁하고 김해성으로 들어갔다. “김해는 영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니, 김해가 무너지면 영남을 잃게 되고, 영남을 잃으면 나라가 모두 적의 것이 될 것이니,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 성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송빈이 순절하던 날 장대(將臺)의 벽에 적어놓은 시는 충절단성(忠節丹誠)의 대표적인 시로 꼽힌다. 송빈은 전쟁이 끝난 후에 공조참의, 1875년(고종 12)에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이대형(李大亨)은 과거를 포기하고 ‘관천거사(觀川居士)’라 불리며 부모를 봉양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사 서예원과 인척이었던 이대형이 부사에게 보낸 입성을 청하는 글에서, “내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고 있는데, 내 비록 벼슬은 없어도 이런 위급한 때를 당하여 의를 버리고 생을 도모한다면, 신민(臣民)된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며 전투에 참전하였다. 장정 100여 명을 이끌고 김해성으로 들어가서 남문을 지키며 싸우다 순절하였다. 선조 때 장예원 판결사, 1879년(고종 16)에 호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김득기(金得器)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지내던 중 임진왜란을 맞았다. “한 번 급제한 것도 역시 나라의 은혜이니 무리와는 다르다. 어찌 차마 몸을 온전히 하고 처자를 보전할 수 있으며, 시골에서 살기를 구하겠는가”라고 하고는 성 안으로 달려갔다. 부사 서예원이 동문을 맡기자 수성장으로서 지키다가 성이 함락될 때 순절하였다. 선조 때 첨지중추부사, 1879년(고종 16)에 호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류식(柳湜)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군이 월당진[현재 대동면 월촌리]을 건너서 쳐들어오자, “우리 집안이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겠는가” 하고, 집안사람들과 노비를 이끌고 김해성에 들어갔다. 이때 일본군이 호계천 상류를 막아 김해성 안에 물이 끊겼다. 성 안의 사람들은 갈증으로 고통을 겪었고 항복하자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류식이 이를 꾸짖고 객관 앞의 땅을 팠는데 샘물이 솟아났다. 그 물을 들어 일본군에게 보이자, 일본군은 ‘신과 같은 사람이 반드시 성 안에 있을 것이다’라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1885년(고종 22)에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사충신 이외 인물의 의병 활동]
임진왜란 때 김해 지역에서 의병으로 활동한 인물은 사충신 외에도 여러 인물들이 있다.
강보손(姜甫遜)은 정유재란이 일어나 일본군이 마을을 침략하자, 노복(奴僕) 선봉(先奉)과 예봉(禮奉)을 데리고 마을 산 정상으로 올라갔는데 일본군이 추격해 오자, “내가 임금을 위해 죽을지언정 어찌 개 같은 오랑캐의 포로가 되겠느냐” 하고 갓끈으로 자결하였다. 일본 장수가 장하게 여겨 매장해 주었는데, 뒷날 사람들이 관정산(冠頂山)[김해 백두산]이라 부르고 있다.
이령(李伶)은 함안군 검안촌에서 태어났는데, 임진왜란 발발 소식이 알려지자, 의병 100여 명을 모아서 김해성으로 달려갔다. 김해부사 서예원로부터 동문 수성의 임무를 부여 받아 활약하였다. 서예원이 도망한 후에 일본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대군과 맞서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이령의 후손에게는 복호(復戶)의 혜택이 주어졌다. 고종 연간에 시호(諡號)와 정려(旌閭)를 받았으며,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안민(安慜)은 함안에서 김해부 시례로 이주한 인물이었는데, 선조(宣祖) 때 무과에 급제하여 부호군(副護軍)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서 임진년에 휴가를 얻어 김해에 있으면서 감로사에 있는 안향(安珦)의 시판을 다시 판각하러 갔다가 일본군이 쳐들어 온 소식을 들었다. “나라가 어지러워 흔들리는데도 도망하여 달아남은 임금의 밥을 먹는 자가 감히 할 수 없는 바다. 하물며 우리 집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고 관록의 몸에 있음에랴” 하고, 4월 23일 승려 100여 명과 바로 읍성으로 달려가다 길에서 일본군을 만나 싸우다 죽었다. 아들 안신갑(安信甲)이 이야기를 듣고 달려가자, 조선의 충신 안민이 여기서 죽었다고 쓰인 팻말을 일본군이 걸어 놓았으므로 뒤에 고향에 반장(返葬)하였다. 안민순절유적비(安愍殉節遺蹟碑)가 불암동에 있다.
윤붕(尹鵬)은 훈련원 주부였는데, 아버지 윤경신(尹耕莘)이 창의하여 싸우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적진으로 들어가 일본군을 죽이고,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돌아왔다.
이 밖에도 김해 사람으로서 공신(功臣)에 선정되거나 정표(旌表)를 받은 경우도 다수 있었다. 사노(私奴) 억복(億卜), 학생 이득배(李得培), 직장(直長) 이몽린(李夢麟), 사복(司僕) 안진(安軫) 등은 선무원종공신 3등에 오른 인물들이다.
[김해 의병 활동의 의의]
임진왜란 때 김해 의병의 중요한 의미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의병의 창의가 아주 빨랐다는 점이다. 또 김해성 함락 이후에는 인근 군현으로 의병이 흩어지면서 일본군의 폭력성을 알려 다른 지역에서 의병이 창의하도록 선도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임진왜란 때 김해 의병의 활동이 비록 김해성 함락으로 단절되었지만, 김해 의병의 역할은 결코 작지 않았다. 하지만 의병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약탈은 이어졌고, 이후 관군의 재정비가 이루어져 정상화되자 의병의 비중은 축소되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국가가 의병을 통제하고 해체시키자, 의병은 관군으로 편입되든지 귀향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