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6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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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大亨 |
영어공식명칭 | Lee Daehyung |
이칭/별칭 | 태래(泰來),관천거사(觀川居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강식 |
[정의]
임진왜란 당시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의병.
[가계]
이대형(李大亨)[1543~1592]의 본관은 월성이고, 자는 태래(泰來)이다. 고조할아버지는 호조참판에 추증된 이개지(李介智)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한 이중현(李仲贒)이다. 할아버지는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이포(李玸)인데, 현감 백자정(白自精)의 딸과 혼인하여 김해로 옮겨 살았다. 아버지는 군자감주부를 역임하고 판결사(判决事)에 추증된 이경유(李景裕)이다. 어머니는 상주 황씨로, 참판에 추증된 황면(黃沔)의 딸이다. 이대형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 휘하에서 활동한 오운(吳澐)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이우두(李友杜), 이사두(李思杜) 두 아들을 낳았다.
[활동 사항]
이대형은 1543년(중종 38) 김해 활천리에서 태어났다. 활천 냇가에 집을 짓고 스스로 ‘관천거사(觀川居士)’라 불렀다. 김해부사 서예원(徐禮元)과 인척이자 벗이었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해부사가 편지로 적을 쳐서 나라에 보답할 의리를 말하였다. 이대형이 두 아들에게 위급한 때를 당하여 신민(臣民)된 도리를 다하겠다고 하고, 장정 100여 명을 이끌고 김해성으로 들어가 남문을 지켰다.
1592년 4월 17일 왜군이 성을 포위하고 북문에 물을 대어 위기가 다가오자, 도망하려는 서예원에게 “부사가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며, 김해는 영남의 요충으로 먼저 침략을 당하는 데도 지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꾸짖었다. 4월 19일 밤에 일본군이 허수아비를 성안으로 던져서 혼란에 빠지자, 서예원은 북문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이대형은 물러서지 않고 군사를 거두어 성을 지켰다. 4월 20일에 적이 들판의 보리를 베어 성 주위의 구덩이를 메우고 성안으로 들어오자, 이대형은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이후 부하 양업손(梁業孫)이 살아 나와 전투 상황을 보고함으로써 이대형의 순절이 알려졌다. 이대형의 아들 이우두는 김해읍성이 함락되자 성에 들어가 아버지의 시신을 찾다가 적에게 살해당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대형은 1600년(선조 33) 통정대부 장례원판결사에 추증되었고, 1880년(고종 17)에는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1784년(정조 8) 송빈, 김득기와 함께 송담서원에 배향되었고, 1871년에는 사충단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