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6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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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許景胤 |
영어공식명칭 | Huh Kyungyoon |
이칭/별칭 | 사술,잠계,죽암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강식 |
출생 시기/일시 | 1572년 - 허경윤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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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허경윤 수로왕릉 봉분 수축 |
활동 시기/일시 | 1609년 - 허경윤 신산서원 재건 주도 |
몰년 시기/일시 | 1646년 - 허경윤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22년 - 허경윤 구천서원 배향 |
출생지 | 김해부 대사동 -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 |
학교|수학지 | 산해정 -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
묘소 | 허경윤 묘소 - 경상남도 김해시 상동면 우계리 중산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학자.
[가계]
허경윤(許景胤)[1572~1646]의 본관은 김해이다. 자는 사술(士述)이고, 호는 잠계(潛溪)였다가 후에 죽암(竹庵)으로 고쳤다. 할아버지는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제자인 진사 허국정(許國楨)이다. 아버지는 참봉 허세절(許世節)이며, 어머니는 판서 김선(金璿)의 딸 강릉 김씨이다. 허경윤은 본래 의령참봉 허세돈(許世敦)과 사인(舍人) 어영준(魚泳濬)의 딸 함종 어씨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허세절에게 양자로 보내졌다.
[활동 사항]
허경윤은 김해부 대사동[현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노모를 모시고 함양으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김해의 수로왕릉을 왜군이 도굴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00여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김해로 돌아와 봉분을 다시 쌓았다.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에게 청원하여 조정에서 망제례(望祭禮)를 지내도록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김해부사에게 수로왕릉을 다시 정비하도록 청원하였다.
1605년에는 동방 오현(五賢)을 문묘에 종사하여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선조가 학문의 깊이를 칭찬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조식(曺植)[1501~1572]이 학문을 닦던 산해정과 창건 중이던 신산서원이 불에 타버리자, 1609년 황세열(黃世㤠)·안희(安熹) 등과 함께 부사 김진선(金振善)의 협조를 받아 신산서원을 세우고 사액을 받았다.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자, 전답을 팔아 수백 석의 군량미를 모으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노쇠하였던 허경윤은 아들 허빈(許瀕)과 종질 허연(許演)에게 의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의병이 문경새재에 이르렀을 때 조정이 청나라와 화약을 맺었다는 소식이 전하여졌고, 아들은 김해로 돌아왔다. 허경윤은 통곡하며 산으로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다가 1646년 김해부 망해정에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허경윤은 문집으로 『죽암집』을 남겼다. 일집(逸集) 형태인데, 권1에는 시 30수와 서(書) 7편, 잡저 4편을 수록하였다. 특히 오언절구의 시 「산거(山居)」는 한적함 속에 외로움도 곁들인 서정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권2는 부록으로, 봉안문(奉安文) 등이 수록되었다. 후대인들이 덧붙인 부록에는 「영모재중건기」 등도 실려 있다.
[묘소]
허경윤의 무덤은 경상남도 김해시 상동면 우계리 중산 언덕에 있으며, 중산 아래에는 허경윤의 위패를 봉안한 구천서원이 있다.
[상훈과 추모]
허경윤은 1822년 구천서원에 배향되었다.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에 있는 김해 허씨 회현 종중의 재실인 영모재(永慕齋)에도 허경윤의 별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