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700 |
---|---|
한자 | 金升泰 |
영어공식명칭 | Kim Seungtae |
이칭/별칭 | 김시여(金時汝),낙운(洛雲)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인덕 |
출생 시기/일시 | 1878년 6월 6일 - 김승태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2일 - 김승태 무계리장터 만세 시위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6월 5일 - 김승태 부산지방법원 징역 2년 선고 |
몰년 시기/일시 | 1940년 2월 9일 - 김승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김승태 대통령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김승태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동 |
활동지 | 무계리장터 -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로 287-22[무계동 189-3] |
묘소 | 김승태 묘소 - 경상남도 김해시 대청동 산78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승태(金升泰)[1878~1940]는 1878년 6월 6일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동 김해 김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자는 시여(時汝)이고, 호는 낙운(洛雲)이다. 절충장군 김여해(金麗海)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김규환(金奎煥), 어머니는 함안 조씨 조순남(趙順男)이다. 아들로 김영준을 두었다.
[활동 사항]
김승태는 1919년 4월 12일 김해군 장유면 무계리[현 경상남도 김해시 무계동] 무계리장터에서 열린 만세 시위를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다. 이날 시위는 김종훤(金鐘烜)이 서울에서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오면서 본격적으로 준비되었다. 4월 11일에 김승태는 김종훤·최현호(催鉉浩) 등 10여 명의 인사들과 장유면에서도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12일 무계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12일 김승태는 50여 명의 주민들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무계리장터로 갔다. 이강석 등 주민들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시장까지 행진하였다.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김종훤 등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선창하자, 군중은 이에 호응하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무계리장터 중심가를 행진하다가 헌병주재소까지 갔는데, 일본 헌병이 총을 난사하자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오후 1시 반경에 재집결하였다.
화난 시위대는 헌병주재소를 포위하여 돌멩이를 던지며 공격하였지만, 김해헌병분견소에서 지원병이 도착하여 발포하면서 시위 군중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과정에서 선두에 섰던 손명조·김용이·김선오 세 사람은 총탄을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김승태는 이날 현장에서 체포되어 김해헌병분견소 유치장에 수용되었다가 4월 14일에 부산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6월 5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부산감옥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1920년 4월 14일 출소하였다. 1940년 2월 9일 사망하였다.
김승태의 어머니 조순남이 쓴 내방가사 「자식소회가」는 무계리장터 만세 시위를 준비하는 과정과 체포되어 재판받는 모습, 출소한 이후 일어난 일들을 일부 기록하고 있다.
[묘소]
김승태의 무덤은 경상남도 김해시 대청동 산78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승태는 1977년에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1981년에 ‘낙운 김승태 기적비’가 세워졌는데, 현재 김해시 내동 연지공원 내로 옮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