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7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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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鐘烜 |
영어공식명칭 | Kim Jonghwon |
이칭/별칭 | 야암(也庵)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인덕 |
출생 시기/일시 | 1893년 2월 1일 - 김종훤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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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2일 - 김종훤 무계리장터 만세 시위 주도 |
몰년 시기/일시 | 1948년 10월 20일 - 김종훤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8년 - 김종훤 대통령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78년 - 야암김종훤지사독립운동기적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김종훤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경상남도 김해시 유하동 |
활동지 | 무계리장터 -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로 287-22[무계동 189-3]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23-1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종훤(金鐘烜)[1893~1948]은 1893년 2월 1일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유하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고, 호는 야암(也庵)이다. 문경공 김탁의 20대손이며, 아버지는 김원기(金元基)이다.
[활동 사항]
김종훤은 마을 서당에서 7년 동안 수학하였다. 이후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에 비밀 결사 조직에서 활동하다가, 귀향하여 신문의숙(新文義塾)을 창설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서울의 파고다공원 독립선언식에 참가하였다가, 지방 행사 책임을 맡고 선언문 수백 매를 가지고 귀향하였다. 김종훤은 김해 지역 만세 시위를 획책하여 각 면 동지에게 선전하고, 장유면에서는 김승태 등과 상의하여 거사에 주력하였다. 1919년 4월 12일 수천 명의 군중을 동원하여 김해군 장유면 무계리[현 경상남도 김해시 무계동] 무계리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손명조·김용이·김선오가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고, 김종훤은 주모자로 체포되었다. 김종훤은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고문으로 시신경에 이상이 발생하여 눈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고, 38세에 결국 실명하였다. 1948년 10월 20일 사망하였다.
[묘소]
김종훤의 유해는 경상남도 김해시 유하동 사리산에 안장하였다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김종훤은 1968년에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1978년 ‘야암김종훤지사독립운동기적비(也庵金鐘烜志士獨立運動紀蹟碑)’가 유하마을에 건립되었는데, 현재는 김해시 삼계동 화정공원 내로 옮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