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704 |
---|---|
한자 | 李康奭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하지영 |
출생 시기/일시 | 1879년 8월 7일 - 이강석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2일 - 이강석 무계리장터 만세 시위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6월 5일 - 이강석 부산지방법원 징역 1년 선고 |
몰년 시기/일시 | 1923년 8월 17일 - 이강석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3년 - 이강석 대통령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이강석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경상남도 김해시 내덕동 |
활동지 | 무계리장터 -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로 287-22[무계동 189-3]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23-1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강석(李康奭)[1879~1923]은 1879년 8월 7일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내덕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12일 김해군 장유면 무계리[현 경상남도 김해시 무계동]의 무계리장터에서 발생한 만세 시위를 이끈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이날 시위는 김종훤(金鐘烜)이 서울에서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오면서 본격적으로 준비되었다. 이강석은 4월 11일에 김승태(金升泰), 최현호(催鉉浩) 등의 장유면 인사들과 장유면에서도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거사일은 4월 12일 무계리 장날로 정하였고, 각자 마을에서 주민을 규합하여 무계리장터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4월 12일 오전 10시경 이강석은 자신이 동원한 마을 주민 50여 명을 선두에서 이끌며 무계리장터로 향하였다. 12시경 무계리장터에 도착하였는데, 장터는 이미 2,000여 명의 군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김종훤 등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뒤 만세를 부르자, 이강석도 사람들과 함께 호응하며 대한 독립 만세를 높이 외쳤다.
시위대는 장터 곳곳을 행진하다가 무계리헌병주재소 앞까지 갔는데, 일본 헌병들이 제지하며 총을 난사하였다. 이때 선두에 서서 저항하던 손명조(孫明祚), 김선오(金善五), 김용이(金用伊)가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고, 많은 사람이 부상당하였다. 이를 목격한 사람들이 재집결하여 헌병주재소를 포위하고 돌을 던지거나 곤봉을 휘두르며 공격하였다. 그러나 김해헌병분견소에서 파견한 지원병이 또다시 발포하며 군중을 해산시켰다.
이강석은 시위에 참여한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1919년 6월 5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항소하였지만, 1919년 7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3년 8월 17일 사망하였다.
[묘소]
이강석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이강석은 1983년에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