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7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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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鏞明 |
이칭/별칭 | 송강용명(松岡鏞明)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하지영 |
출생 시기/일시 | 1897년 3월 11일 - 조용명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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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2일 - 조용명 무계리장터 만세 시위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6월 5일 - 조용명 부산지방법원 징역 3개월 집행 유예 2년 선고 |
몰년 시기/일시 | 1949년 12월 7일 - 조용명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19년 - 조용명 대통령표창 추서 |
출생지 | 경상남도 김해시 신문동 |
활동지 | 무계리장터 -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로 287-22[무계동 189-3] |
묘소 | 조용명 묘소 - 경상남도 김해시 신문동 산17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조용명(趙鏞明)[1897~1949]은 1897년 3월 11일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신문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양이다. 창씨명은 송강용명(松岡鏞明)이며, 아버지는 조봉기(趙奉基)이다.
[활동 사항]
조용명은 1919년 4월 12일 김해군 장유면 무계리[현 경상남도 김해시 무계동]의 무계리장터에서 발생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날 시위는 서울에서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온 장유면 유하리[현 경상남도 김해시 유하동]의 김종훤(金鐘烜)이 4월 11일에 김승태(金升泰)·이강석(李康奭)·최현호(催鉉浩) 등의 장유면 인사들과 모의하면서 시작되었다. 김종훤 등은 거사일을 4월 12일 무계리 장날로 정하고, 범등포 갈대밭 등지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주민을 규합하였다.
4월 12일 정오 무렵 무계리장터에는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김종훤 등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선창하자, 이에 호응한 사람들이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높이 외쳤다. 조용명도 사람들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장 곳곳을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무계리헌병주재소 앞에 도착하였을 때 일본 헌병들이 총을 난사하였는데, 선두에서 저항하던 손명조(孫明祚) 등 3명이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조용명은 사람들과 함께 돌을 던지고 곤봉을 휘두르며 주재소 건물을 공격하였다.
이후 조용명은 시위에 참여한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6월 5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개월, 집행 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1949년 12월 7일 사망하였다.
[묘소]
조용명의 무덤은 경상남도 김해시 신문동 산17번지 반룡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조용명은 201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