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7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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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恒來 |
이칭/별칭 | 순구(順九)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배병욱 |
출생 시기/일시 | 1884년 8월 24일 - 조항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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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2일 - 조항래 무계리장터 만세 시위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12월 13일 - 조항래 부산지방법원 징역 1년 선고 |
몰년 시기/일시 | 1949년 4월 27일 - 조항래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조항래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경상남도 김해시 신문동 |
활동지 | 무계리장터 -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로 287-22[무계동 189-3] |
묘소 | 조항래 묘소 - 경상남도 김해시 신문동 산43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조항래(趙恒來)[1884~1949]는 1884년 8월 24일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신문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순구(順九)이다. 평양 조씨 첨추공파(僉樞公派) 29세손이며, 아버지는 조익상(趙益相),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부인은 광주 안씨이며, 아들로 조남기(趙南基)를 두었다.
[활동 사항]
조항래는 김승태(金升泰)·김종훤(金鐘烜)·이강석(李康奭)·김용주(金鎔鑄)·조용우(趙鏞宇)·최현호(催鉉浩) 등과 함께 1919년 4월 12일 김해군 장유면 무계리[현 경상남도 김해시 무계동] 무계리장터에서 열린 만세 시위를 주도한 지도부 중 한 사람이다. 4월 11일 지도부는 장유면 신문리 범동포의 이학도(李學道) 주막에 모여 거사를 최종 점검하고, 갈대밭 속에서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만들어 마을별로 나누어 가졌다.
4월 12일 조항래는 장유면 응달리·수가리의 주민을 동원하여 무계리장터 만세 시위에 적극 동참하였다. 일본 군경이 시위 진압을 위해 출동하여 무력을 행사하자, 조항래는 군중과 함께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습격하는 등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조항래는 시위대 해산 이후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었으며, 1919년 12월 1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49년 4월 27일 사망하였다.
[묘소]
조항래의 무덤은 경상남도 김해시 신문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조항래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