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743
한자 姜永甲
이칭/별칭 강대갑(姜大甲)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전성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0년 4월 8일연표보기 - 강영갑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32년 - 강영갑 사회과학연구회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33년 4월 22일 - 강영갑 부산지방법원 징역 1년 선고
활동 시기/일시 1938년 3월 3일 - 강영갑 부산지방법원 징역 2년 선고
추모 시기/일시 2018년연표보기 - 강영갑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경상남도 김해시 서상동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김해공립농업학교 - 경상남도 김해시 금관대로 1239[외동 743]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강영갑(姜永甲)[1910~?]은 1910년 4월 8일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서상동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강대갑(姜大甲)이다. 1930년 김해공립농업학교[현 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강영갑은 김해 지역에 미친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를 몸소 체험하였다. 1930년 2월 1일, 김해공립농업학교 1·2학년 전원과 3학년 일부가 참여하여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일본 경찰은 시위에 참여한 학생 77명을 체포하였다. 곧이어 대부분 방면되긴 하였지만, 일부는 여전히 취조받았다. 2월 4일 조회 시간에 강영갑은 체포된 학생들의 방면을 주장하다가 체포되어 7일간의 구류 처분을 받았고, 학교로부터는 퇴학당하였다.

강영갑은 이후 김해청년동맹과 김해농민조합 청년부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1932년 무렵 김해농민조합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노재갑 등과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한 것이 주목된다. 강영갑은 1932년 4월 일본 경찰에게 예비 검속되었다가 풀려났으나, 결국 사회과학연구회 활동으로 7월 4일 체포되었다. 1933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고, 11개월간 복역하였다.

1934년 출옥 후 사회과학연구회에서 함께 활동하였던 노재갑·허성도 등과 김해농민조합 재건을 위해 힘썼다. 하자마농장 소작쟁의를 제대로 지도하지 못한 김해농민조합을 새로운 대중 조직으로 전환시키고자 2년 여에 걸쳐 혁명적 전위의 양성과 대중에 기반한 조직 마련을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이 일본 경찰에 포착되어 1936년 9월 다시 체포되었다. 이후 1938년 3월 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9년 8월 16일 출옥하였다.

강영갑은 1945년 해방 이후에도 경상남도 지역에서 사회 운동과 노동 운동에 계속 종사하였다. 인민당과 조선공산당의 지역 조직에 이름을 올렸으며, 1947년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경남도평의회,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남도위원회 등에서도 활동하였다.

[상훈과 추모]

강영갑은 2018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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