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7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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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盧相益 |
영어공식명칭 | Ro Sangik |
이칭/별칭 | 치삼(致三),대눌(大訥),모헌(某軒),노교리(盧校理)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엄경흠 |
출생 시기/일시 | 1849년 11월 12일 - 노상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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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82년 - 노상익 별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 노상익 홍문관시강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 11월 - 노상익 서간도 망명 |
몰년 시기/일시 | 1941년 9월 16일 - 노상익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17년 - 노상익 대통령표창 추서 |
출생지 |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 |
거주|이주지 | 이주지 - 경상남도 밀양시 |
거주|이주지 | 망명지 -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1층 108실 178호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산41-2] |
성격 | 학자|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홍문관시강 |
[정의]
개항기~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
[가계]
노상익(盧相益)[1849~1941]은 1849년 11월 12일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치삼(致三)이고, 호는 대눌(大訥)·모헌(某軒)이다. 아버지는 노필연(盧佖淵)이고, 어머니는 창녕 성씨 성욱호(成郁鎬)의 딸이다. 동생은 노상직(盧相稷)이다. 부인은 안진중(安振重)의 딸 광주 안씨로, 노우용(盧右容)·노희용(盧喜容) 등 두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활동 사항]
노상익은 1882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1883년부터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고향 김해로 낙향하였다가 밀양으로 옮겨가 후학을 양성하였다. 1905년 홍문관시강이 되었으나, 경연이 제대로 열리지 않자 사직하였다. 1906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부산에 올 때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어 밀양 영남루에 구금되었다. 1910년에는 일제의 은사금을 거부하여 태룡동파견소(泰龍洞派遣所)에 갇혔다가 풀려나는 일이 있었다.
끊임없이 일제의 감시를 받던 노상익은 1911년 11월 서간도로 망명하여 안동현(安東縣)[현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에 정착하였다. 망명 이후 이승희(李承熙)가 창립한 한인공교회(韓人孔敎會)에 참여하여 유교 개혁 운동에 동참하였으며, 군자금 모집 관련 활동을 하였다. 1919년 고국에서 동생 노상직이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가 체포당하자, 노상익도 극심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이후 1922년 또다시 군자금 모집 관련 인물로 지목되었고, 망명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김해로 돌아왔다. 귀향 후 금곡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 천산재(天山齋)를 짓고 두문불출하다가 1941년 9월 16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노상익의 저술로는 『대눌수권(大訥手卷)』, 『대눌수권속편(大訥手卷續編)』, 『도강록(渡江錄)』, 『견문쇄록(見聞瑣錄)』, 『동제고략(東制考略)』, 『통사절요(痛史節要)』를 포함한 필사본 약 28종이 전한다.
[묘소]
노상익은 처음 천산재(天山齋) 뒷산에 안장되었다가 2019년에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1층 108실 178호로 옮겨졌다.
[상훈과 추모]
노상익은 201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