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6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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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盧佖淵 |
영어공식명칭 | Noh Pilyeon |
이칭/별칭 | 한약(漢若),극재(克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상현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
[가계]
노필연(盧佖淵)[1827~1885]의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자는 한약(漢若)이고, 호는 극재(克齋)이다. 할아버지는 노우수(盧禹壽)이고, 아버지는 노봉문(盧奉文)이다. 부인은 창녕 성씨이다. 아들은 노상익(盧相益)과 노상직(盧相稷)이며, 딸은 안인원(安演遠), 성진영(成搢永), 허달(許達)에게 출가하였다.
[활동 사항]
노필연은 1827년(순조 27)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 부곡면에서 태어났다. 1843년(헌종 9)에 김해 서림사(西林寺)에서 『시경』을 익혔으며, 1846년(헌종 12)에 신천(新川)의 만학재(晩學齋)에서 『주역』을 배웠다. 1849년(헌종 15)에 청송에서 강학하다가 김해 금곡(金谷)으로 돌아와 용봉재(龍鳳齋)에서 독서하였다. 1855년(철종 6)에 부친상을 당한 후 학업을 그만두었다가, 1864년(고종 1)에 김해부사로 부임한 허전(許傳)[1797~1886]에게 배운 뒤 허전의 문인이 되었다. 1866년(고종 3) 허전과 함께 함안 용화산(龍華山)을 유람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종료 소식을 듣고 대신 척사문(斥邪文)을 지었다.
1873년(고종 10) 김해 금곡의 영지동(靈芝洞)에 극기재(克己齋)를 건립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7년 후인 1880년(고종 17)에 창녕 국동(菊洞)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이때 극기재도 창녕으로 옮겨 지었다. 1885년(고종 22) 아들 노상익이 시종신(侍從臣)이 되자 통정대부에 가자되고, 부호군을 증직받았다. 1885년 4월 6일 창녕 국동 앙음정(仰飮亭)에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묘소]
『극재집』에 따르면, 노필연은 1885년(고종 22) 8월에 창녕 대곡촌에 안장되었다가 1887년(고종 24)에 옥야방(沃野坊) 봉곡(鳳谷)으로 이장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