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7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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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盧相稷 |
영어공식명칭 | Ro Sangjik |
이칭/별칭 | 치팔(致八),소눌(小訥),눌인(訥人),자암병수(紫巖病叟)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엄경흠 |
출생 시기/일시 | 1855년 11월 21일 - 노상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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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노상직 파리장서 서명 |
몰년 시기/일시 | 1931년 3월 24일 - 노상직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3년 - 노상직 건국포장 추서 |
출생지 |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 |
거주|이주지 | 이주지 - 경상남도 창녕군 |
거주|이주지 | 이주지 - 경상남도 밀양시 |
거주|이주지 | 이주지 - 경상남도 창원시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23-1 |
성격 | 학자|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개항기~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
[가계]
노상직(盧相稷)[1855~1931]은 1855년 11월 21일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자는 치팔(致八)이고, 호는 소눌(小訥)·눌인(訥人)·자암병수(紫巖病叟)이다. 아버지는 노필연(盧佖淵)이고, 어머니는 창녕 성씨 성욱호(成郁鎬)의 딸이다. 형은 노상익(盧相益)이다. 노상직은 후에 작은아버지 노호연(盧滈淵)에게 입양되었다. 첫째 부인은 장수 황씨이고, 둘째 부인은 진주 하씨이다. 슬하에 5남 5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노상직은 1866년 허전(許傳)[1797~1886]의 문인이 되었다. 1879년 창녕으로 이주하여 추원재(追遠齋)를 지었고, 1883년부터 학도를 모아 하과(夏課)를 열었다. 그러나 1885년에 친아버지, 1886년에 스승 허전과 생모가 사망한 이후 강학을 중단하였다. 부모상을 모두 마친 1888년부터 다시 강학을 시작하였다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김해로 돌아왔다. 이후 밀양으로 이주하여 1895년에 금산서당(錦山書堂), 1896년에 자암초려(紫巖草廬)를 짓고 강학에 매진하였다.
1910년, 형 노상익이 일제의 은사금을 거절하여 일본 헌병대에 갇혔다가 풀려나는 일이 있었다. 그 후 노상익은 1911년 11월 서간도로 망명하였는데, 노상직도 한 달 후에 가족을 이끌고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1912년 노상익에게 입양 보낸 아들 노식용(盧寔容)이 망명지에서 사망하자, 노상익은 노상직에게 귀국할 것을 강력하게 권하였다. 이에 노상직은 형의 권유를 받아들여 밀양으로 귀향하였다. 귀향 후 1914년부터 강학을 재개하였으며, 선현의 저술을 간행하는 데 힘썼다.
1919년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파리장서운동이 일어나자, 노상직도 자신의 문도 14명과 함께 적극 참여하여 문서에 서명하였다. 노상직 등은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취조받았다. 1926년부터는 자암서당을 중수하고 저술 작업과 강학에 매진하였다. 말년에는 아들 노가용(盧家容)과 마산으로 이주하여 지내다가, 1931년 3월 24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노상직은 『동국씨족고(東國氏族攷)』·『역연제강(歷年提綱)』·『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가락국사실고(駕洛國事實攷)』·『역대국계고(歷代國界考)』·『여사수지(女士須知)』·『성리절요(性理節要)』·『자암일록(紫巖日錄)』·『소눌문집(小訥文集)』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 외 허전의 아들 허운(許運)과 함께 『성재문집(性齋文集)』의 초고인 『용어(庸語)』와 연보를 정리하고, 허전의 행장을 짓기도 하였다.
[묘소]
노상직의 장례는 고향 금곡리 안산에서 유림장으로 치러졌다. 이후 2009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노상직은 2003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