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7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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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弘鉉 |
이칭/별칭 | 덕첨(德瞻),저은(渚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배병욱 |
출생 시기/일시 | 1867년 - 이홍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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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이홍현 협신주식회사 참여 |
추모 시기/일시 | 1921년 1월 15일 - 이홍현 구휼기념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928년 4월 - 전주이공 홍현시혜비 건립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3월 - 이홍현 장유면협의회원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 이홍현 간이보통학교 부지 기부 |
몰년 시기/일시 | 1937년 - 이홍현 사망 |
출생지 | 경상남도 김해시 관동동 덕정마을 |
묘소 | 화산정사 - 경상남도 김해시 관동로27번길 5-37[관동동 337] |
성격 | 자산가|자선가 |
성별 | 남 |
본관 | 전주 |
대표 경력 | 장유면협의회원 |
[정의]
개항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자산가이자 자선가.
[가계]
이홍현(李弘鉉)[1867~1937]은 1867년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관동동 덕정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다. 자는 덕첨(德瞻)이고, 호는 저은(渚隱)이다. 중종의 다섯째 아들 덕양군(德陽君) 이기(李岐)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통정대부 이주국(李周國)이다.
[활동 사항]
이홍현은 한말 김해에서 설립된 협신주식회사(恊信株式會社)에 참여하였다. 1908년 4월 21일 발기한 협신주식회사의 설립 취지는 “세상이 진화함에 따라 때를 놓치지 않고 생존함으로써 ‘문화 자주적’ 국민이 되는 것”이었는데, 식산흥업으로 실력 양성을 도모한 개항기 계몽 운동의 한 부류로 생각된다.
이홍현은 자산가일 뿐 아니라 자선가로도 명망이 높았다. 1918년 『매일신보』에 따르면, 이홍현이 매년 동리 빈민을 구제하였는데, 1918년 봄에도 수백 원어치의 곡식으로 빈민을 구제하였다고 한다. 당시 동리의 빈민들이 이홍현을 “참 모범될 자선가”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이홍현의 자선 활동은 관동리나 장유면을 넘어 이홍현의 토지가 있던 일대의 빈민들에게 두루 미쳤다. 1921년 3월에는 아들 이승수(李承秀)와 공동 소유한 토지 총 500두락 중 340두락을 친척, 또는 토지 관리자 등 50여 명에게 무료로 허락하였다. 또 1935년에는 이웃한 김해군 녹산면 녹산리[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에 개교하기로 한 간이보통학교가 부지 문제로 어려움을 겪자, 자신의 소유지 1,290㎡를 기부하였다.
이홍현은 자선 활동으로 조선 총독부가 하사하는 목배를 1915년 등 여러 차례 받았고, 1931년 지방 제도 개정 후 제1회 장유면협의회원 선거에서 14표를 얻어 10명 중 4위로 당선되었다. 1933년 낙동대교 개통식에서는 고을에서 가장 복록이 있는 사람으로 선발되어 처음으로 다리를 건너기도 하였다. 1937년 사망하였다.
[묘소]
이홍현의 무덤은 경상남도 김해시 관동동 화산정사(華山精舍)에 있다. 묘비명은 오진영(吳震泳)이 찬술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홍현의 자선 활동을 기리기 위해 1921년에 ‘이홍현 구휼기념비(李弘鉉 救恤紀念碑)’[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가, 1928년에 ‘전주이공 홍현시혜비(全州李公 弘鉉施惠碑)’[경상남도 김해시 관동동]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