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781
한자 崔大星
영어공식명칭 Choi Daesu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종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6년 11월 2일연표보기 - 최대성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최대성 이북면장 취임
몰년 시기/일시 1978년연표보기 - 최대성 사망
출생지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명동리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김해공립보통학교 - 경상남도 김해시 호계로500번길 15-15[동상동 534]지도보기
묘소 최대성 묘소 -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덕암리 산51 지도보기
성격 공무원
성별
대표 경력 이북면장

[정의]

6·25전쟁 중 양민 학살을 막은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공무원.

[가계]

최대성(崔大星)[1906~1978]은 1906년 11월 2일 경상남도 김해군 이북면[현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명동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최오동(崔五銅), 어머니는 김임오(金壬吾)이며, 5형제 중 맏이이다. 정순금(鄭順今)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최대성은 김해공립보통학교[현 김해동광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23년 이북청년회를 결성하였고, 1926년에는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이북면의 지방 서기로 임명되었고, 1945년 10월 25일 초대 이북면장이 되었다. 이후 6·25전쟁을 거쳐 1956년까지 약 12년간 이북면장을 지냈다.

6·25전쟁 중이던 1950년 8월 3일 대한청년단 단원과 김해경찰서 한림지서의 경찰들이 비상소집 명령을 내려 국민보도연맹원 100여 명을 이북면 소재 금융조합 창고에 구금하였다. 그러나 이때 구금된 사람 중 누구도 살해되지 않았다.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결정서’에 따르면, 김해시 국민보도연맹사건 희생자는 272명이다. 그중 이북면 거주자는 모두 4명인데, 이들은 모두 CIC[육군 정보국 특무대]에 직접 연행되어 살해된 사람들이었다.

이북면 국민보도연맹원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면장 최대성이 경찰의 학살을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해당 사실은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로 공식 기록되었다. 최대성은 당시 이북면 대한청년단 단장이었던 동생 최대홍을 통해 경찰을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창고에 구금된 젊은 사람들을 모두 대한청년단에 가입시킨다는 조건으로 석방시켰고, 나이 든 사람은 창고 뒷구멍으로 탈출하게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최대성을 ‘김해의 쉰들러’라 부르기도 한다. 1978년 72세로 사망하였다.

[묘소]

최대성은 사망 후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명동리 앞산에 처음 안장되었다. 이후 김해시 주촌면 덕암리 산51번지 덕암마을의 선산으로 이장되었다. 「최대성묘비명」은 영남 기호학파의 마지막 유학자라 불리는 화재 이우섭이 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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