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771
한자 朴錫權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배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6년연표보기 - 박석권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9년 9월 - 박석권 김해금융조합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박석권 합성학교유지회 고문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박석권 김해면협의회원 당선
추모 시기/일시 1967년 - 허발·박석권 선생 공적기념비 건립
출생지 경상남도 김해시 동상동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거주지 - 경상남도 김해시 서상동 지도보기
성격 자산가|사회 운동가
성별
본관 밀양
대표 경력 김해교육회 부회장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자산가이자 사회 운동가.

[가계]

박석권(朴錫權)[1886~?]은 1886년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동상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며, 아버지는 박성필(朴成弼)이다. 박석권의 집안은 선대부터 상업으로 많은 부를 쌓아 수백 석의 재산을 보유하였다. 잡지 『개벽』에서는 1923년 당시 김해의 대표적 부호로 박석권을 들었고, 집안의 분묘 및 산정(山亭) 서벽정(棲碧亭)에 대해 “실로 왕자의 호사에 비하리만큼 굉장한 것”이라고 하였다.

[활동 사항]

박석권은 김해 경제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1909년 9월에 김해금융조합을 설립하여 조합장이 되었고, 1916년 안희제가 설립한 경남인쇄주식회사의 대주주가 되었다. 광명점(廣明店), 김해식산상회, 김해공성상회(金海共成商會) 등의 잡화점을 경영하며 곡물·비료를 취급하였고, 김해면협의회원[1929~1935] 등 공직도 역임하였다.

박석권은 여러 차례 수해 이재민 등의 어려운 이웃을 구휼하였고, 소작인들에게도 아량을 베풀어 칭송받았다. 1920년 상하이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구포 사람 오영대(吳英大) 등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였고, 1925년에는 김해북내노농단(金海北內勞農團)의 의사(議事)를 맡는 등 노동·농민 운동청년 운동 등에도 관여하였다.

1920년 합성학교유지회 고문장을 맡아 재정난에 빠진 합성학교[현 김해합성초등학교]를 인수하는 등 교육 운동에 매진하면서 박석권의 명망은 더욱 높아졌다. 1921년에 합성학교는 초등과 고등 과정을 병설하여 재탄생하였고, 박석권은 김해교육회 총무로 선임되어 허발(許墢) 등과 함께 설립자가 되었다. 1926년 합성학교의 재산을 충당하여 김해공립농업학교[현 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현 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를 설립하려는 기성회가 등장하여 김해교육회 측과 분쟁을 벌였다. 박석권은 이때 경상남도 유일의 민간 경영 교육 기관인 합성학교를 파멸시키는 것은 “김해 인사의 치욕일 뿐 아니라 전 조선인 사회의 치욕”이라는 비판 성명을 발표하였다. 분쟁 끝에 경상남도 당국의 타협안을 수용하여 기존 합성학교 건물을 경상남도에 인도하고 신축 교사로 이전하였지만, 교육 문제를 민족 운동의 일환으로 여긴 박석권의 소신을 알 수 있다.

1936년 『동아일보』는 교육부터 공공 사회사업에 이르기까지 “[박석권] 씨를 제외하고는 김해 사회의 중진을 말할 수 없을 만큼 [박석권] 씨의 존재가 다대하다”라고 하였는데, 박석권이 김해 지역의 존경받는 유지이자 사회 사업가였음을 알 수 있다.

[상훈과 추모]

김해합성초등학교 내에 1967년 건립된 ‘허발·박석권 선생 공적기념비’가 있다. 박석권이 논 300석지기를 희사하여 합성학교를 설립한 것을 민족 운동의 횃불을 든 선행으로 평가하면서 “김해 사람과 또 배달민족 전체의 큰 자랑이며 명예”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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